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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Jan 17. 2022

<죽은 시인의 사회>를 살릴 수 있다면...

B.T.F 독서클럽

20대 친구들과 함께하는 독서모임 B. T. F (Book Talk Friends)에서 2달째 'Dead Poet Society'를 읽고 생각을 나누고 있다. 어린 시절 이 이야기를 영화로 처음 접했을 때는 키팅 선생님의 자유분방한 가르침이 신기했고 그것을 통해 억압된 아이들의 감정표출하는 장면을 보고 대리만족을 느끼며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Captain, My Captain!"을 외치며 키팅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했던 마지막 모습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인생 샷이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책으로 읽으니 그때처럼 쉽게 읽히지 않고 더 복잡하고 힘든 감정의 굴곡이 내 마음을 훑고 지나간다.

결국, 키팅 선생님은 희생양이 되었다.

전통과 훈육을 중시하며 미국 내 최고의 대입 성적으로 명문 엘리트 기관임을 자부하는 웰튼 스쿨. 그곳에 입학한 아이들은 기본적인 감정, 욕구, 흥미 등은 철저히 통제당한 채 정해진 틀 안에서 최고의 입시 성적을 위해 조련당하는 듯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등장한 키팅 선생님. 첫 시간부터 시의 정의를 강의하는 데 책의 서문을 뜯게 한다. 또 어느 날은 새로운 관점을 보게 한다며 책상 위에 올라가게 하고, 어떤 날은 박수를 치며 교정을 걷게 한다. 하루는 졸업생들의 사진을 보며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라고 한다. 어리둥절해하며 듣는 시늉을 하는 학생들에게 슬그머니 가서 "Carpe Diem"을 속삭인다. 그는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다르게 보고 그 속에서 시를 만들고 음미하도록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교수법을 펼쳤다. 그러던 어느 날 연극을 좋아하던 닐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극의 주인공으로 무대를 멋지게 한 그날, 아버지의 차가운 냉대속에 집에 끌려 가 닐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억울하게도 키팅 선생님은 모든 책임을 지게 되고 사랑하던 학생들로부터 떠나게 될 위기에 처한다. 아이들은 부모와 학교의 무언의 압력, 그리고 무력한 자신의 처지를 인지하고 키팅을 학교에서 몰아내는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말았다. 이젠 같은 교사의 입장이 되어서 그런 걸까. 결국 외롭게 교직에서 쫓겨나게 된 그를 보며 과한 감정이입을 하며 한동안 우울한 기분에 빠져있었다.

세상은 왜 더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아프게 하는 걸까.

키팅은 그가 학생 시절, <죽은 시인들의 사회>의 이름을 만들었던 것처럼 세상은 시라는 것을 받아들일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까. 세상은 지배하는 권력자들이 원하는 데로 하는 수동적인 인간, 질문하지 않는 인간을 기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웰튼 스쿨은 학벌이라는 미끼로 아이들을 지배하고 교육이라는 감옥에서 순응하는 인간을 만들고 있었던 것. 그 속에서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시인들은 살아남기는 애당초 어려웠던 거였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이른다. 삶을 사랑하고 자유의지와 배움 그 자체의 즐거움을 전하고자 했던 키팅은 제거할 대상이 되었고 모두의 잘못을 그에게 덮어 씌움으로써 아이들에게 진정한 배움을 주고자 했던 그는 내쳐지고 말았다. 그는 무자비한 학벌 중심 사회의 희생양이었다.

죽은 시인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눈먼 자들의 도시인 듯 세상은 있는 그대로를 보고 인정하기를 두려워한다. 닐의 아빠도 닐을 나름의 꿈과 희망이 있는 아이로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했다. 아빠의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할 사람이 아들이었고 아빠의 불안을 없애 줄 사람도 아들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아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 서툴고 힘들었다. 닐의 아빠가 그대로의 아들을 수용하였다면 닐은 스스로에게 총을 겨누지는 않았을 텐데...

닐은 왜 용기 내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없었을까. 무엇이 그를 움츠러들게 만들었을까. 생각보다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와 희망을 꺾기 힘들어한다. 세상의 많은 착한 딸, 아들들이 부모의 기대와 희망에 부흥하고자 스스로 접은 욕망으로 인해 감정이 왜곡된 어른 아이로 사는 것을 종종 본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 이것은 닐에게 꼭 주고 싶은 단 하나의 처방이다. 물론, 정말 쉽지 않은 일일 테지만...

'받아들임'과 '용기'는 다르게 쓰이지만 같은 말일 수도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의 부모, 자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내가 내 스스로에게도 내 주변의 사람들과도 하고 싶은 일은 바로 '받아들이는 용기'이다. 이것은 건강한 관계의 시작이고 자아성장의 튼튼한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친구들을 인정하고 나의 부족함과 강점을 받아들이고 나아갈 수 있을 때 진정한 성장이 시작된다. 아직 시인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 각각의 목소리와 색깔로 미약하고 소심한 우리 마음의 작은 동굴 속에서 살아있다. 우리 안의 시인을 죽이고 누르고 가두어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 일수도 있지 않을까. It's time to wake all the dead poets in ourselves.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구글 캡쳐
There is a great need in all of us to be accepted, but you must trust what is unique or different about yourself, even if it is odd or unpopular. (p.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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