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천개의 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요일 May 14. 2024

오월에 부치는 편지

대한민국에서 교사로 살아남기

맑은 오월, 물빛 구름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제 알겠다.

얼마나 외로웠는지 이제 알겠다.

결국 혼자였다고 생각했을 때

사랑하는 아이들 곁을 떠나야겠다고

결정했을 때

죽음만이 그 선택을 바꿀 수 있었으리라.


절대로 일을 사랑하지 마라.

절대로 아이를 생각하지 마라.

누구도 믿지 마라.

반대로만 말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들은

가라앉는 배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했었고

자기가 한 말은 하지 않았다고 발뺌했었다.

진실은 숨겨져 있고

거친 음성녹음과 메마른 종이로 된

증거만이 나를 대변할 뿐.


나의 진심을

나의 열정을

나의 노력을

담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아이들 앞에서 거짓과 위선을 가르쳤었나.

배신과 이기로 가득 찬 세상에

만만한 먹잇감만을 키워냈던 것일까.

 

규정속도로 운전하고

횡단보도 파란불에 길을 건넜던 나는

신호도 속도도 무시한 채

음주운전인 듯 졸음운전인 듯

돌진하는 차를 맨몸으로 받아냈다.


아이들을 이끌고 걷던

나의 행로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신호를 따르며 길을 건넌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든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줄 이는 없다.


넘어진 나를 밀치고 뺑소니쳤던 성난 사람들은

나의 깊은 한숨을 알기나 할까.


절대로 떠날 것 같지 않았던

사랑했던 교직을 떠날 수도 있겠다.

생각했던 거친 밤을 그들은 알기나 할까.


20년도 넘게 교직과 아이들을 생각하며

실패와 도전으로 쌓아 올린 내 작은 소명을 알기나 할까.


그들은

신호를 무시하고 돌진하는 차가 오면

피하라고 말해줬어야 했다.

파란불에 길을 건넜던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항변해주었어야 한다.

폭언하는 민원인의 전화를 그냥 끊어도 되었다고 말해주었어야 했다.

가라앉는 배에서는 가만있지 말고 뛰어내리라고 했어야 했다.


누구에게 억울함을 말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 그 설움을 얘기할 수 있었을까.


우리의 세금으로 우리를 지키라고 만들어놓은

시스템은 많은 돈과 많은 시간과 많은 체력이 있는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다.


내 사건을 들은 변호사 한 명은 500만 원부터 시작되는 변호사수임료를 내면

정신적 피해까지 다 포함해서 겨우 600만 원쯤 보상받을 거라는 아픔값을 계산해주었다.

득 보다 실이 많을 거라는 변호사들의 조언에

멍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교육청 교권보호위원회에 내가 겪은 악성민원인 사건을 접수하겠다고 했다. 담당장학사는 그렇게 해봤자 이득이 없다고,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교권위 회부를 말렸다. 서둘러 나는 학교장종결 사안으로 마무리.

며칠 후, 교원노조에서 사건 처리의 이상한 점을 따져 묻자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음성녹음은 없다. 바보같이 장학사의 말을 믿은 내 잘못만 덩그라니.


미치도록 파란 하늘에

미칠 것 같이 맑은 오월에

지나가던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라는

지인들의 말대로

내가 정말 미쳐가고 있는 건지

세상이 미쳐가고 있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긴긴밤이 흐르고 있다.


지독히도 외로운 스승의 날 이브에 

지독히도 까만 생각들이 또 나를 덮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