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자리에서 나를 면전에 두고 큰 딸이 내뱉는 말이다. 과체중인 딸이 벌써 컵볶이 하나를 먹어놓고는 그걸 숨기고 저녁을 먹겠다고 하니 안 먹는 게 낫지 않냐고 했을 뿐이다. 느닷없이 쏟아지는 경멸의 눈빛과 모멸에 찬 말 한마디에 나 또한 화가 차오른다. 딸의 저녁밥도 이미 준비해 놓고도 기어코 듣기 싫은 한마디를 하고 마는 나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지만. 신경질적으로 숟가락을 탁탁 거리며 먹고 싶은 반찬만 얄밉게 먹는 그녀. 다 먹고는아무렇지도 않은 듯 거실 소파에 떡하니 앉아 TV시청 삼매경이다. 내 속은 뒤집어놓고 시시덕 거리며 아주 신난 모습에 슬슬 약이 오른다.쓴소리 하고싶은 욕구가 차올랐지만 참았다. '상전이다. 정말!' 허공에육두문자,혼잣말만 둥둥~
2호는 어떤가.
중3, 둘째는 혼자서일찌감치저녁밥을 차려먹고 취침 중이다. 설거지는 산더미고, 두꺼운 돼지고기를 썰어놓은 김치찌개 한 그릇에 돼지목살까지 구워 먹은 육식위주의 식사. 그 처참한 흔적이 싱크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 진짜 각자 먹을 거 설거지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지저분한부엌, 산적한 일거리에 푸념과 한숨이 제멋대로 흘러나온다.
퇴근 후, 이런 장면에웃을 수 있는 부모가몇 명이나있을까.육아전문가들은 사춘기아이들을 어른처럼 대하고 없는 장점도 찾아 칭찬해 주라고 하지만 딴 나라 이야기처럼 머릿속에서 맴돌 뿐. 더 거친 말을 하려다 참는 것, 그 정도하는 것만으로도 정말힘들다.
어제저녁, 설거지를 하는 게 힘들어서 각자 먹은 것을 치워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던 터였다. 허리디스크가 나아지고 아침저녁으로설거지를시작했더니 슬슬 통증이 시작되었다. 무거운 그릇에 구부정한 자세에 요리하느라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나면 하루 종일 서있던 다리까지 통증이 시작된다. 증상이 나아져도 안심할 수 없는 지라 건강 앞에는 늘 조심 또 조심이다.엄마의 상황이래도 사춘기아이들한테까지 나를 이해해 주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인가.
밖으로 나간다.
차오르는 감정을 감지하고 분노든 설움이든 뭔가 하나라도 터져 나오기 전에 운동가방을 챙겨 급하게 나온다. 산들산들 시원한 바람이 좋다. 주민센터 2층 내가 좋아하는 가장 끄트머리 러닝머신에 올라 최애채널을 돌려 TV를 고정하고 천천히 뛰기 시작한다. 몸이 움직이니 머리는 멈추고 생각이 서서히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속도를 올려 뛸 때쯤 기분도 조금씩 나아진다.한바탕 뛰고 잠시 한숨 돌리는 그때 도착한 막내의 문자.
큰 놈들한테 상처받고 막내한테 치료받는다. 애셋을 낳고 키우는 건, 조물주나름의 치밀한 계획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육아의고통도 주지만 그것을 견딜 힘도 동시에 준다는 것. 좌절하고 실망하고 우울해하다가도 또 웃을 일이 생긴다. 그러면 또 힘든 일은 잊고 그럭저럭 살아진다. 나이 어린 막내가 50이 다 된 엄마의 감정을 챙기는 게 대견하기도 하고 동시에안쓰럽기도 하다. 이토록나약한 멘털을 가진내가 창피하기도 하고.
불편한 감정이 튀어나오면,
그 불편한감정안에 푹 빠져 그 감정이 지나가도록 내버려 둘 때도 있고 뭔가 새로운 일을 하며 잊어버리기도 한다. 운동을 하고 이웃집 엄마를 불러 한 동안 수다를 떨고 막내의 사랑스러운 문자를 받고 나니 서운한 마음은 한층 가라앉았다.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밝은 달처럼 환한 큰딸의 얼굴이 훅 들어온다.
엄마, 나 한국사 1등급이다. 근데 다른 과목 등급은 비밀~ㅎㅎㅎ
이토록 해맑은 그녀, 나도 모르게 같이 웃고 만다. '그럼 그렇지. 저런 해맑은 아이를 두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얼핏보니아들도 뒤늦게 식세기에 그릇을 넣어두었다. 다음날 아침, '실행'버튼을 안 눌러 세척이 하나도 안 됐음을 발견했지만. 그래도 그릇을 넣어둔 게 어딘가. 낮은 기대와 빠른 포기로 사춘기 아이들과 공생하는 생존기술을 하나씩 터득해 간다. 아이들에게 완벽함을 바라는 건 나만의 욕심이라는 걸 알기에. 양보하고 이해하고 조금 덜봐야 내 마음이 편하다. 불쑥불쑥 터져나오는 분노와 화를 조절할 비법이 우리가족평화의 핵심 키다. 어설픈 결말로 5인 가족 일상이 어찌저찌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