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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Sep 29. 2024

[사유원] 하나만 투어

빨간가방과 백일해

드디어 가을

어딜 가든 높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 쾌적한 온도가 여행하기에 좋은 시기다. 평소 예술에 조예가 깊은 박사급 정보통 지인 K의 추천으로 사유원엘 간다. 뚜벅이들은 범접 못 할 먼 곳이지만 KTX와 시티투어의 도움으로 당일투어에 도전. 그런데 늘 제 시각에 우릴 태워다 추던 큰 차들이 오늘따라 타이밍이 영 안 맞는다. 버스가 제시간에 안 와서 늦을 것  같다는 카톡메시지가 연거푸 몇 번이나 울린다. 기차 출발 2분 전, 우여곡절 끝에 숨을 헐떡이며 셋 다 겨우 플랫폼에 골인했다. 특히, 지인 S는  버스를 타고 늦을 것 같아 긴급히 고급 택시로 갈아타고 타고 긴장 속에서 질주했다고. 그 여파로 그녀는 한 동안 컨디션 회복에 난항을 겪었다. 그로 인한 웃픈 에피소드는 차례로 개봉박두.


동대구역에서 한 시간 거리, 사유원

 광명역에서 동대구역까지 2시간 30분 남짓. 동대구역에 도착해서 사유원으로 가는 시티투어버스를 탄다. 한 시간쯤 가면 도착하는 그곳, 사유원. 이름부터가 남다르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TC태창 철강회사의 사야 유재성  사장평생 아끼던 바위, 소나무, 배롱나무, 모과나무 그리고 세계적인 건축가, 조경가, 예술가들의 합작으로 이 공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유지로 만든 수목휴양정원인데 민간에 개방한 지 약 3년 되었다고. 평일 5만 원, 주말 6만 5천 원 후덜덜한 입장료지만 한번 다녀온 지인 K는 몇 번이고 또 오고 싶은 곳이라고 했다.


 팔공산 산등성이 능선을 따라 꾸민 이곳은 자연인 것 같으면서 예술작품 같은 모습, 정성을 다한 조경과 독특한 건축물이 최고의 조화를 이뤄냈다. 혼자 왔으면 명상에 잠겨 수양인 듯 피정인 듯 고요한 시간을 보냈겠지만 나이를 초월한 솔메이트 지인 K, 그리고 S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 배꼽 잡는 에피소드와 질 높은 대화가 걸음과 걸음사이 공간과 공간사이의 여백을 꽉 채워 지루할 틈이 다.


도란도란 걷는 오솔길
풍설기천년

조경: 정영선, 박승진

돌: 카와기시 마츠노부

조명 : 고기영


풍설기천년은 모과 정원이다. 6천여 평 부지에 설립자가 평생 수집한 300년 이상의 모과나무 108그루가 이곳에 있다고 한다. 정원 가운데 계곡으로는 세 곳의 연못이 있고 각각의 이름은 연당, 채당, 회당.


바람과 눈비를 맞으며 세월을 이겨낸 모과나무의 강인함을 표현하고 천년을 가는 모과 정원이 되라는 의미에서 풍설기천년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어. 꽃이름이 이상한데요~

지인 S는 걷다가 붉은색 꽃이 만발한 나무 앞에 멈춰 선다.

지인 S: 이 꽃이름이 백일해인데 백일동안 피어있어서 그런 거래.

나: 아, 그래요? 근데 꽃이름이 병이름이랑 닮았네요.

지인 S: 아. 맞다. 백일해 아니고 백일홍

둘이같이 : ㅎㅎㅎ


백일홍을 설명하는 진지한 S교사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릴 만도 한데 그게 너무 웃겨서 배꼽을 잡고 한참을 웃었다. 백일해든 백일홍이든 절대 잊지못 할 것 같다. 지인 S는 아침에 기차 타느라 너무 뛰어서 아직도 정신이 안 돌아온 거 같다고 민망함에 둘러댔지만, 그 후로도 바쁜 아침의 여파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름이 좀 이상하다~

길을 걷다 S교사는 전화를 받는다.


어. 여기 대구에 왔어. 소유원이라고 철강회사 사장이 지은 휴양림인데...


어. 이상하다. 소유원? 뭔가  안 맞는다.


부장님, 여기 분위기가 뭔가 소유하는 느낌은 아닌데...

아, 맞다. 사유원 ㅋ


또다시 깔깔대며 웃는다. 도대체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자꾸만 한 끗 차이로 어긋나는 말실수에 웃음이 멈출 틈이 없다.


음식점 몽몽미방

연못을 곁에 둔 멋진 음식점 몽몽미방을 거쳐 멋들어진 한옥이 있는 유원으로 향한다. "아. 이래서 돈이 있어야 해. 돈 많으면 이렇게 멋진 정원도 가꿀 수 있고 말이야." 기승전돈으로 끝나는 당황스러운 감상평에 종종 푸념이 섞이기도 했지만 걷는 내내 아름다운 풍경을 폰에 담고 감탄하고 구경하느라 바쁘다.


유원

사야정 건축 : 박창열

조경 : 정영선, 박승진

조명 : 고기영

한옥 사야정에 들어서니 팔공산 비로봉이 바로 보인다. 풍광을 한옥 마루에서 감상하니 옛 시대 풍류를 즐기던 선비가 된 기분에 여유와 평화가 느껴진다.


내심낙원

건축 : 알바로 시자, 카를로스 카스테네이라



 근대 한국 가톨릭계의 거장이자 사유원 설립자의 장인 김익진, 그와 영혼의 우정을 나눈 찰스 메우스 신부를 기리는 경당이다. 좁고 높은 경당 안에 들어서자, 왠지 모를 경건함에 나도 모르게 조용해진다. 십자가의 힘은 예수님에게 빚진 나약한 인간의 초라함을 상기시키고 다시금 겸손해지게 만드는 신비스러운 힘을 가진다. 나도 가만히 십자가상 앞에 앉아 내 안의 바람과 소원을 그분에게만 조심스레 속삭여본.


가가빈빈

 경사진 산책로를 거슬러 올라오니 어느새 제일 높은 곳, 카페 <가가빈빈>에 도착했다. 이름이 독특해서 한문전공 S교사에게 묻는다. 친절하게도 뜻과 풀이를 해주신다.

嘉嘉彬彬- 아름다울 즐길, 좋아할 (가) 빛날(빈)
: 彬彬은 외양과 내용이 어우러져 조화된 모양.

각 분야에 전공자인 지인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이래서 좋다. 듣도 보도 못한 전문지식을 아주 쉬운 설명으로 들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왔더니 배가 고프다. 입구에 들어서자 백자 항아리가 단아한 모습으로 우릴 맞이한다. 배고픔에 감상은 잠시 미뤄두고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와 300년 된 모과나무의 모과로 만든 차를 서둘러 주문한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향기로운 차를 마신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중국어 전공자의 중국사 강의, 지식과 교양이 여유로운 시간 속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명정

건축 :  승효상


 식사를 마치고 명정을 지나간다. 이곳은 현생과 내생이 교차하는 곳이라고 한다. 현생에서 허기를 때우고 내생으로 입성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앞으로 보이는 산세와 억새가 어우러진 가을 풍경은 하늘과 땅을 연결한 자연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꽃, 나무, 풀 같은 살아있는 생물을 가꾸어 멋진 풍경을 만들어내는 건 누구 하나의 힘은 아닐 것이다. 하늘과 빛과 공기와 바람, 그리고 인간 모두가 합심해 만든 작품이겠지. 그 위대한 콜라보를 지휘한 조경가, 건축가들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로지 하늘만 보이는 마당, 물이 흐르는 망각의 바다, 붉은 피안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고 작은 성소와 좁은 통로로 둘러 쌓여 있다. 망각하고 잊어야 피안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건데, 나는 뭣 때문에 불편하고 괴로운 기억을 붙잡고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어리석은 인간의 고집은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하고 있음을 . 그런데 그걸 떨쳐버리는 것, 그게 안된다. 그래서 열반의 경지는 아무나 오를 없는 거겠지. 



소대

건축: 알바로 시자, 카를로스 카스테네이라


소대는 기울어진 20.5m의 탑이다. 기울어진 계단을 비스듬히 올라가면 사유원의 360도 풍광을 사각형 액자 같은 건축물 창으로 볼 수 있다.

멀리 또 가까이 안에서 또 바깥에서 몸을 내밀고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 모두 그 느낌이 다르다. 콘크리트 구조물에 난 창인지 틈인지 모를 테두리를 같이 두고 보면 한 폭의 풍경화 같고 몸을 내밀고 바깥을 보면 열기구를 타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해방감이 든다. 공간을 비우고 가두고 꺾고 비틀어냄으로써 다른 시각적 효과를 염두에 둔 건축가의 영민함에 혀를 내두르고 만다.



소요헌

건축 : 알바로 시자, 카를로스 카스테네이라

 알바로 시자는 피카소의 임신한 여인과 게르니카를 전시할 마드리드 오에스테 공원의 가상 프로젝트를 사유원에 새롭게 만들어냈다. 피카소의 작품 대신 시자의 조각들이 설치된 소요헌, 생명과 죽음의 순환이 새겨진 공간으로 말이다. (사유원 브로셔참고)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이곳은 사각형의 공간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틈과 트임으로 답답함 없이 빛과 바람이 통한다. 차가운 느낌의 회색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담쟁이넝쿨과 사각형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딱딱한 사각형 공간에 숨을 불어넣는다.


때맞춰 열리는 오페라 공연에 소리와 울림까지 꽉 채워져 퍼진다. 유난히 깊고 진한 성악가의 노랫소리가 귀로 들어와 머리를 울리고 가슴까지 흔들어 놓고 만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리니

마음은 앞날에 살고
지금은 언제나 슬픈 것이니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지나간 것은 또 그리워지나니

-푸시킨-


삶이 나를 속일 때 나는 너무나 노여워하고 절절히 슬퍼했다.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인지라 슬픈 날을 무한히 견딜 힘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만 포기하고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던 적이 많았다. 그런데 삶의 이면에는 늘 슬픔과 고통이 1+1으로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길 기다리면 되는 데, 나를 치고 밀고 흔들어 놓는 태풍 같은 고통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담대해져야 하는데.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면 섞어버려지고 마는 것처럼 삶의 고통은 그저 행복과 함께 딸려오는 증정품정도로 생각하고 행복을 먼저 찾고 줍고 챙겨야 한다. 거추장스러운 증정품은 반납 못할 바에는 잘 쟁여두었다가 꼭 필요한 곳에 써야지. 아직도 고통과 슬픔에 초연해하는 것이 힘들기만 하지만, 세상이 그냥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수용의 힘은 조금씩 차오르고는 있다. 희망을 찾는 서바이벌 테크닉으로 지금 현재 내 귓가에 흐르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가사에 푹 빠져본다. 기어이 뜨거운 것이 내 눈에서 한 방울 흐르고 말았지만.



빨강 가방 하나의 힘


 그녀는 빨강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평소에 남다른 패션감각을 보여주긴 했지만, 오늘 그녀의 붉은 톤 가방은 신의 한 수였다. 어디서 어떻게 찍든 빨강가방이 초록 풍경과 어우러져 화룡점정을 만들고 말았으니, 그녀는 과연 타고 난 패셔니스타. 박수를 보냈다. 계속되는 칭찬 세례에 시크하게 돌아온 그녀의 한 마디.


오늘 여기가 초록이니까
빨강으로 챙겨 왔죠.


그녀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퍼백에 최고급 간식을 개별 포장해 담아 무심하게 툭 던져줄 때부터 알아봤다. 그녀의 안목과 센스가 남다르다는 걸.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소대에서 빨간색 가방과 풍경이 환상적으로 만나  멋진 사진이 찍힌 걸 보고 우리의 S교사는 말씀하셨다.


아. 역시 여기가 포토샵이야.


나는 조용히 말씀드렸다. "부장님, 포토샵이 아니라 포토존"  또 한 번 빵 터지고 말았다. 역시 오늘의 MVP는 S교사였다. 끊임없는 웃음과 분노와 긴장과 즐거움을 보여주시는 약방의 감초시다. 그녀의 인기는 이래서 식을 줄을 모른다. 오늘은 빨강가방과 S교사가 열일했다. 열심히 사유하는 건 나의 몫! 보람찬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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