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하나만 투어 (3)
결국 아키하바라로
극적으로 협상에 성공했다. 아들 친구 두 명의 동의를 구하고 나와 아들, 친구들 두 명까지 넷은 아키하바라, 나머지는 숙소로 갔다. 한 바탕 격렬한 충돌하고 나니 정신이 쏙 빠져버리고 말았다. 교통카드를 잃어버린 줄 알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결국 지갑 안쪽에 숨겨진 카드를 발견하고는 허무함에 긴 한숨을 내쉰다. 자포자기하듯 아들에게 말한다.
엄마가 너희들한테 먼저 묻지 않고
일정을 바꿔서 미안해.
그런데 너도 원하는 걸 화내지 않고
담담하게 그냥 얘기했으면 좋겠어.
그러면 감정 싸움 없이 좋은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둘 다 노력해 보자.
아들은 낮은 목소리로 "눼~"라고 답한다. 아들은 엄마가 힘든 것도 알고 자신도 화를 심하게 냈다는 것도 안다.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은 누구나에게 있다. 그럴 수 있다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만둔다.
드디어 아키하바라에 도착했다. 화려한 불빛, 알 수 없는 글자로 화려하게 유혹하는 네온사인들, 눈이 휘둥그레 해진다.
두리번두리번 구경하며 건담이 있는 곳을 검색해 찾아간다. 그런데 구글지도에도 표시된 건담숍이 없다. 아쉽지만 다른 곳을 찾아간다. 제일 크고 화려한 건물을 가본다. 파파고를 이용해 건물안내도를 한국어로 찾아보고 아이들이 원하는 층으로 고고. 도착해 보니 벽면과 진열장에 갖가지 인형, 피규어들이 빽빽하다. 더 재미있는 풍경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혹은 건장하고 우람한 체구의 남성들이 장남감에 열광하며 구경하는 풍경이었다. 이런 물건들은 어린아이들이나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나 보다.
아이들은 원하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기분이 좋아 보인다. 쿨하게 자유시간을 주고 나는 쉴 곳을 찾아 헤맨다. 화장실 앞에 겨우 작은 벤치 하나가 보여 철퍼덕 앉는다. 피로감이 몰려온다.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화들짝 놀라 깨서 얘들을 찾아본다. 진열장 사이에서 뭔가를 보면서 열띤 토론을 하는 남학생들이 보인다. 왠지 그 모습이 귀엽다. 덩치는 커서 어른인데 감정은 제멋대로 요동치는 어린아이들, 오랜만에 보는 순수한 그 모습이 반갑기만 하다.
구경하고 싶은 게 더 있다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건물 밖으로 나온다. 복작이는 거리 속을 헤매며 저녁에 뭘 먹으면 좋을까 적당한 식당을 찾는다. 30분쯤 지났을까. 아이들이 돌아온다.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근처 라멘집엘 간다. 그림과 최소한의 영어설명을 단서로 암호를 해석하다 실수로 그만 한 그릇을 더 주문하고 말았다.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스스로를 자책했다가 생각을 바꾼다. '아니다. 차라리 잘 됐다. 아이들을 넉넉하게 먹일 수 있으니 다행이다.' 생각하고 넘긴다. 처음 하는 일에 완벽은 없다. 실수나 잘못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넘겨야 여행이 즐거우니까. 어설픈 논리지만 스트레스는 건강의 적이다. 어떻게든 정신건강을 지켜내는 것이 최우선임을 잊지 않는다.
정돈된 도시의 빛, 스카이트리
맛있게 저녁을 먹고 스카이트리 앞에서 다른 일행들을 다시 만났다. 초고속으로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에 도착하니 불빛으로 만들어낸 멋진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자로 자른 듯한 정갈한 도시의 골목과 집들, 또 정확하게 반짝이는 불빛이 흑백의 하늘과 대비되어 더욱 환하다. 사방이 유리로 만들어진 전망대를 360도로 돌아보며 멋진 야경에 취해본다. 감상에 젖어들어갈 찰나, 힘들다며 슈퍼베이비, 큰 아들이 슬슬 짜증을 보이기 시작한다. 나도 급 피로감이 몰려와 부리나케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숙소로 간다. 이렇게 도쿄에서의 단 하루.
꽉 찬 하루의 일정은 우여곡절 끝에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성년의 날, 센소지
2박 3일 짧은 일정의 마지막 반나절 일정은 숙소 근처의 센소지다. 그곳은 도쿄 안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라고 한다. 야무지게 짐을 싸서 숙소에 맡기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목적지로 향한다. 마침 성인의 날이라 절 앞은 아침시간인데도 북적인다. 골목 양쪽에는 먹거리며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재밌는 물건들을 구경하며 걸으니 너무 재밌다. 인파를 헤치고 절에 도착하니 수많은 인파 속에서 기모노를 입고 젊은 사람들, 소원을 빌고 참배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많은 군중들이 모이는 행사임에도 거리가 너무 깨끗하다는 것이다. 바닥에 휴지가 나뒹굴거나 그 흔한 전단지도 보이지 않는다. 일본을 직접 경험한 것이 며칠 되지는 않지만 남에게 절대로 피해를 끼치지 않고 깔끔한 일본인의 성향이 인상 깊었다. 문득, 이런 국민성을 가지면서도 우리에게 보인 잔혹한 역사적 만행이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퍼펙트 데이즈
며칠 전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봤다. 일본 영화인데 배경이 익숙하다. 주인공은 도쿄의 공공 화장실을 청소하는 한 중년 남자이다. 그가 매일 저녁을 사 먹는 장소가 아사쿠사역이고 주인공이 착잡한 기분에 맥주캔을 따던 곳이 스미다강이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는 늘 우뚝 선 스카이트리를 보며 운전을 하는 그. 점심식사는 간단하게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먹는다. 작고 사소한 디테일이 익숙한 것들이라 영화 보는 내내 얘들한테 귀찮게 묻는다. "여기 알지? 여기 가봤잖아~" 하면서. 흥분한 엄마에 비해 얘들은 '그런가?'갸우둥하며 시큰둥하다.
여행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생각해보면 여행은 굳이 편하고 익숙한 곳을 떠나 사서 고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용을 내고 수고를 하면서 낯선 곳을 하나씩 찾아내고 알아가는 일, 그것이 여행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쉽고 편하게 찾아간 곳은 쉽게 잊히고 만다. 갖은 고생을 하고 일행과 싸우고 지지고 볶으며 헤매며 찾아낸 곳은 더 확실히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다. 맞는 출구를 찾느라 여기저기 왔다 갔다 했던 아사쿠사역이 그랬고 일행을 찾느라 동분서주했던 스카이트리가 그랬고 지하철역을 찾아가느라 지도를 보며 걷던 스미다강이 그렇다. 공평하게도 기억은 공들인 시간만큼 오래도록 남는다.
자유여행을 고집하는 이유
자유여행은 완벽하지 않아서 불편하고 낯설어서 늘 긴장되고 조심하게 된다. 그래서 남의 도움을 찾거나 공부하며 낮은 자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결국 원하는 곳을 찾게 되면 그 성취감이나 뿌듯함은 편한 여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아이들과 여행하면서 정확히 이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을 찾으며 '나'라는 사람의 성향과 취향을 찾고 서로의 요구를 조율하고 목적지를 찾기 위해 주변의 도움을 구하면서 조금씩 성장하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
확실히 달랐다.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 11명 일행을 모아놓고 당부했었다.
얘들아. 여기 이곳 도쿄는 우리 모두 다 처음이야. 엄마들도 찾고 공부해서 여행해야 해야 한단다.
그래서 너희들이 도와주면 좋겠어. 구글지도 켜고 길도 알려주고 맛집도 찾아주고. 부탁할게~
그래서일까. 아이들은 달랐다. 핸드폰 지도를 켜고 길의 방향을 알려주거나 동생들을 챙기기도 하고 엄마가 들고 가는 무거운 짐을 자진해서 들어주기도 했다. 사고 싶은 걸 사라고 준 용돈을 고민에 고민을 더해 보고 고르고 또 고심해서 사는 의젓한 모습도 보였다.
모든 걸 다 해주는 것이 좋은 교육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안다. 하고싶은 일이 있더라도 그것의 현실적 한계와 실정을 사실대로 말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아이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면 아이들은 달라졌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자신이 맡은 일을 했다. 자발성과 주도성,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안에서의 성장. 그것이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 힘들고 고된 일이라 부모님은 '여행'이라 쓰고 '극기훈련'이라고 읽기도 한다. (실은 나도 ㅜㅜ) 하지만,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마음껏 결정할 기회를 주고 실수도 하고 헤메기도 하는 조금 불편한 여행이 진짜 성장으로 가는 퍼펙트 트립(perfect trip)아닐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아들이 말한다.
엄마, 이번 여행 정말 재밌었어요!
p.s. [도쿄]하나만 투어를 읽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곧 딸과 엄마의 [파리]하나만 투어로 다시 찾아올께요.
#라라크루10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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