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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천개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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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Dec 28. 2024

매일 결혼하고 매일 이별하라.

절반뿐인 축사였지만

안녕하세요.

저는 신부의 중학교 3학년 담임이었던 교사 윤병임입니다. 2005년 3월에 만나 이렇게 20년이 지나서 결혼의 선배로써 이 자리에 다시 서게 되니 만감이 교차하네요.


대부분 학교에서는 12월 지금 이맘때쯤이면 한 해 동안 아이들의 성장과 변화를 지켜보고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느라 바쁜 데요. 저는 20년간 지켜본 예나  20년 생활기록부 종합의견을 짧게 작성해보았습니다.


예나는 안과 밖이 똑같은 사람입니다. 언제나 솔직하게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하는 당찬 아이입니다. 때때로 이것 때문에 큰 상처를 받거나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그 솔직함과 진솔함은 예나만이 가진 큰 장점임에 틀림없습니다.

둘째, 예나는 인간적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이고 자신의 잘못과 실수도 인정하고 발전할 수 있는 수더분한 매력을 지닌 사람입니다. 아이나 노인, 주변의 힘없고 약한 생명을 챙길 줄 아는 정이 넘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셋째, 예나는 신의가 깊습니다. 2005년 어느 날, 새콤달콤을 먹고 쓰레기를 바닥에 버려 꾸중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나는 "선생님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당돌하게 따져 물었는데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억울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돼서 와락 끌어안고 미안하다 말해주었던 적이 있었죠. 그 이후,  예나는 매년 명절과 스승의 날, 생일날에도 인사와 안부를  한 번도 빠짐없이 챙겼습니다. 이런 예나는 정말 사랑스럽고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렇게 잘 큰 예나가 오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만난 지 3개월도 안된 사람과 속전속결로 결혼을 결심했다고 해서 실은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랑을 본 순간,  모든 걱정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둘의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렸기 때문이죠. 행복해 보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서로가 행복하다면 괜찮겠다. 짧은 만남이 결혼생활로 이어져 연애하는 것처럼 서로를 알아가며 즐겁게 살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이 둘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올해 저는 결혼 20년 차입니다. 예나를 만났던 해 3월,  저도 막 결혼했었습니다. 저 또한 짧은 만남 후에 결혼한 터라 그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축하의 마음과 함께 몇 가지 당부의 말, 실은 저도 하기 힘든 조언 몇 가지를 여기 계신 모든 분을 대신하여 소박하게나마 전해주려 합니다.

 

한 예화로 시작하겠습니다. 멕시코의 유명한 화가 프리다 칼로는 늘 문란했던 남편 디에고 리베라때문에 걱정이 많았다고 합니다. 상심하고 속상해하던 어느 날,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행복한 결혼을 위한 조건은 뭘까요?

아버지는 아주 간결하게 대답했죠.

'짧은 기억력'이지.



맞습니다. 자꾸 잊어야 합니다. 근데 뭘 잊어야 할까요? 상대가 잘못한 것, 실수한 것은 잊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상대의 좋은 것, 사랑하는 마음만은 오래 기억해야 합니다. 


연애 초기상대에게 푹 빠져 그저 좋은 것만 보는 것을 우리는 "콩깍지가 씌었다"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시간이 지나면 이 콩깍지가 벗겨지고 좋았던 게 나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매사에 큰 흔들림 없이 여유롭게 보여서 좋아 보였던 사람이 갑자기 답답하고 무심해 보이기도 하고요. 어린아이처럼 감정을 표현하고 언제나 조잘조잘 얘기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는데 어느 순간, 말이 너무 많아 피곤하고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어떡해야 하죠? 한쪽 눈을 감거나 잠시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안 좋은 기억, 상대의 잘못에 연연하고 곱씹으면서 결혼을 불행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잘못을 잊고 상대에게 기회를 주세요. 아마 또 실수할 겁니다. 그러면 또 한 번 욕 한번 하고 또 잊으세요. 사람은 안 변하고 우린 또 같이 살아야 하니까요.  자신도 변하기 쉽지 않은데 상대는 오죽하겠습니까. 스스로도 바꾸기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상대를 이해하기 조금 편해질 겁니다.


 그래서 매일 결혼하고 또 이별해야 합니다. 아침에 만나면 어제의 일을 잊고 처음 만난 것처럼 새로운 마음으로 결혼하고 출근하고 회사에 가면 잠시 잊고 이별했다가 다시 만나면 다시 결혼하는 것처럼 그 만남을 소중히 하는 것이 행복한 결혼의 비결일 수도 있겠습니다.



두 번째 일상의 사소한 말, 매직워드(magic words)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아, 그랬구나. (경청의 말)

미안해요. (사과의 말)

수고했어요. 고마워요. (인정의 말)


결혼은 일상이고 생활입니다. 먹고사는 일에 치이다 보면 작고 사소한 것들로 싸우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는 일단 상대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아. 그랬구나! 경청해야 합니다. 잘못한 게 있으면 "미안해요."라고 사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생하고 애쓴 걸 알아차리고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해야 합니다. 이 단순한 말이 얽히고설킨 감정의 꼬임을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 번째는 육아와 교육, 좋은 부모가 되는 예습을 해야 합니다. 아이를 갖기 전에 공부해야 해요. 아이를 가지면 어느 날 갑자기 부모의 자질이 생겨나는 건 아니니까요. 미리 공부하고 준비해서 성숙한 부모가 되어야 해요. 돈만큼이나 중요한 게 부모공부입니다. 그냥 되는 게 아니에요. 그 이야기는 너무 길어서 책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제 책 <샛길독서>를 드립니다. 두 부부가 읽고 좋은 부모가 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제 곧 겨울방학이죠. 지금은 다 커서 두 사람 다 학교는  다니지 않지만 아이가 없는 지금이 방학인 거죠. 방학숙제가 있어요. 이 책을 두 부부가 꼭 읽어보세요. 그리고 소감과 질문을 저에게 보내야 합니다. 2025년 2월 28일까지. 이건 예나의 중학교 담임선생님으로 하는 AS 서비스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지금처럼 이쁘게 서로를 위하는 그 소중한 마음 잃지 말고 길게 영원히 아껴주며 살아가기를 응원합니다. 사랑하고 축하합니다.








결혼 한 시간 전까지 결혼식 축사를 준비하느라 예식 시작 10분 전에 겨우 도착했다. 신부인 제자는 걱정이 되어 15분 전부터 전화기에선 불이 난다. 미안한 마음에 부랴부랴 달려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2005년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도 눈에 띈다. 이젠 어엿한 성인이고 아빠, 엄마가 된 36살 아이들. 16살 때 만난 아이들을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다니 새삼 놀랍고 신기하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나더러 예전이랑 똑같다한다. 칭찬이겠지?! 오랜만에 본 얼굴들이라 근황을 전하고 인사하느라 빠쁘다.


 축사를 할 시간이 되어 단상에 올라갔다. 그런데 갑자기 뭉클해진다. 눈앞이 흐려지고 목이 메어 말이 잘 안 나온다. 힘겹게 숨 고르고 진정해서 다시 말을 시작한다. 중언부언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결국 준비한 말의 반도 못하고 인사를 하고 내려온다.


결혼이라는 것은 아직도 나에겐 어렵고 힘든 숙제 같아서 모법답안을 줄줄 외워 준비해 놓고도 절반도 전하지 못하고 내려오고 말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어떤 말도 그들에겐 필요치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저 잘 살겠다는 서로 간의 약속, 상대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단단한 믿음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실은 다른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았던 축사라서 더 힘겹고 어려웠을 수도 있다. 빈약한 말이었지만 그 속에 제자를 사랑하고 축복을 바라는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그것이 전해졌다면  그걸로 됐다. 식을 마치고 나오는데 친지분들과 제자가 말한다.  "눈물 났어요. 감동이었어요." 하나둘 건네는 인사말에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나부터 잘 살아야겠다. 다시 한번 다짐을 한다. 아이들은 참으로 어른의 스승이다.


#라라크루10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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