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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Feb 08. 2022

낯선 게으름

육아휴직 사용설명서

 이사하고 한 달이 흘렀다. '이사'라는 것이 나에게는 크고 어려웠던 일이었던 탓일까. 막상 집 정리가 끝나고 나니 긴장이 풀리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증이 와버렸다. 게다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 내 집이 아니라 펜션이나 호텔에 잠시 들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역마살 대왕인 내가 낯선 곳에서 묵는 느낌이 드니 계속 집에 있어도 괜찮은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다.

​ 아침 8시, 자기 전 막내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대로 잠들었던 몸을 일으키려 뒤척인다. 그 순간 막내는 손가락 고리를 만들어 내 소매 끝을 당긴다. "으응~" 가느다랏게 눈을 뜨고 가지 말라고 어리광을 부린다. 나도 토닥토닥 안아주며 이불속으로 슬그머니 다시 들어간다. '이런 시간이 얼마나 더 남았을까? 아기 냄새를 맡으며 늦잠 잘 수 있는 시간이'.

​ 휴직이 채 한 달도 안 남았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제주에 갈까? 대구의 미술관을 갈까? 속초 친구네를 다시 놀러 갈까?' 이것저것 하고 싶어 알아본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시간이 나면 새로운 곳을 찾아보고 탐험하길 좋아하는 나다. 휴직의 끄트머리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는 내가 낯설다. 새로 온 집에 아이들도 각자 방에서 부족함 없이 편하게 지내는데 어딜 또 가나하는 생각에 이르자, 다급했던 마음이 스르르 사그라진다. 집에 그냥 있는다.

​ 이번 명절은 코로나로 아주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친척도 친구도 왕래가 없는 그런 썰렁한 설날. 할 일이 없다. 애들과 보드게임을 한다. 바쁠 때는 일주일에 한 번도 하기 힘들었던 청소를 시작한다. 책장도 정리한다. 아이들의 옷장을 살펴본다. 운동화도 빤다. 큰 마음먹고 사춘기 딸과 대화를 시도한다. 민원만 잔뜩 듣고 후회하며 접는다. 게임에 푹 빠진 아들방에 급습한다. 잔소리를 하려다 역공을 듣고 만다. 그 사이 불을 안 끄고 다닌다고 남편은 나에게 혀를 차며 한마디 한다. 바쁠 때는 보이지 않던 귀찮다고 안 보고 피해 다니던 5인 가족의 일상이 팔딱팔딱 살아 움직인다. '나 좀 봐주세요'하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처럼. 이번엔 도망가지 않는다.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다.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온전히 엄마로 무료하게 지내는 시간, 아내로 집에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음을 새삼 느끼면서 아이들 짜증도 남편의 잔소리도 막내의 어리광도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 이렇게 미리 엄마의 관심과 사랑의 포인트를 쌓아두면, 곧 출근할 바쁜 엄마의 빈자리에 두고두고 그 포인트를 꺼내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설을 보내고 다음날 저녁, 애들 셋은 기꺼이 라면을 먹겠다고 한다. 남편은 오랜만에 저녁을 단둘이 먹으러 가자고 말을 건넨다. 10년 넘게 산 부부가 단둘이 있는 시간이 어색하다고 하면 믿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진짜 그렇다. 하지만 그냥 따라나선다. 차도 마신다. 남편회사 이야기, 내 학교 이야기, 애들 얘기, 노후 얘기 그간 못했던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담담하게 대화를 이어간다.


달달하고 시큼한 레몬차

 찻잔에 레몬 몇 조각이 움직인다. 티스푼으로 뒤적뒤적하고 한 모금 마신다. 첫 단맛, 두 번째 신맛 순서대로 혀를 적시고 목을 넘어간다. 조용하고 편한 시간이 되니 차의 맛도 차근차근 느껴진다. 어색할 거라고 생각한 부부의 대화는 레몬차에 물을 부어 우려내고 또 우려내고 말간 맹물 맛만 날 때까지 계속된다. 일로, 사람들로, 모임들로 잠시 미뤄두었던 가족이 레몬차처럼 처음에는 달달한 것이었다가 눈이 찡그려지도록 시큼한 것이 되었다가 서서히 무색, 무취의 맑은 물이 되어 그대로 편안하게 스며든다. 참 오랜만이다. 뭘 하려고, 뭘 바꿔보려고, 뭘 더 찾아보겠다고, 뭘 더 생각하려고 애쓰지 않는 나를 보게 된 것이. 힘을 빼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인 나를 마주하니 그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내 곁의 사람들도 보인다. 낯설지만 소중한 시간. 그간 잊고 지낸 게으름이 준 선물 같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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