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6)
한 해의 끝으로
기말고사출제, 생기부(생활기록부) 작성 및 점검, 학교평가를 해야 할 때가 되면 한 학기, 한 해의 끝이 다 와간다는 뜻이다. 매년 이 맘 때면 마음이 조금 허전하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일이 업무로만 끝나는 것이 조금은 아쉽고 헛헛해서...(극 F의 특징)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일 년을 마감하는 편지를 아이들에게 써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맨날 아이들만 뭔가 적어서 냈었지 선생님은 생기부 말고는 뭔가를 적어서 아이들에게 준 적은 없었던 것 같은 생각에. 고심해서 짤막하게 편지를 쓰고 영작까지 해본다. 혹시 모르니 chat gpt한테 첨삭도 받아 이쁘게 완성한다.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학습지 중간에 내가 쓴 편지를 살짝 끼워서 편집하고 새 까맣게 채워진 글씨로 프린트해서 나눠주었다. 조금은 어색하고 민망하지만 딱딱한 생기부보다는 훨씬 나을 거라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수업시간에 나눠주면서 선생님이 편지를 썼다고 하니, 아이들은 놀래면서 묻는다.
개별로 다 써주신 거예요?
어?.. 그건 아닌데...
90명쯤 되는 아이들, 다 써주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아마도 다 쓰기도 전에 지쳐서 그만 포기할 것만 같아서. 그래서 모두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을 정성스럽게 모아서 하나로 썼다. 그리고 직접 읽어주었다. 한글로 읽다가는 목이 메일 거 같아 영어로 작성한 편지를 또박또박 담담하게 읽어준다.
To my wonderful 3rd graders
I can’t believe it’s already been two years with you. I really enjoyed the time we spent together in English class. Of course, there were some hard times, but I remember your great attitude and smiles more than anything.
I always tried to make English easier and more fun for you, and you followed me so well. You are really smart and kind students. It’s not easy to listen and study hard from the first class to the last, but you always did your best. I was so proud of you for that.
Sometimes, you must have felt tired or didn’t want to study, but you still tried. I remember all your efforts. You joined every activity and game with passion and studied hard for tests. That was really amazing!
Having patience and doing your best until the end is something very special. I’ll never forget your hard work and bright energy.
Please keep that good attitude and do your best in everything you do. Great job, everyone!
With love,
Your All Right English tea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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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멋진 3학년에게
작년 올해, 너희들과 2년 동안 수업 시간에 만나면서 정말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아.
물론 힘든 순간도 있었지. 하지만 너희들의 멋진 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다. 힘들고 어려운 영어를 나름대로 쉽고 재밌게 가르쳐주고 싶어서 샘은 많이 애썼고 너희들도 그 마음을 아는 것처럼 열심히 따라주었지. 너희들은 참 똑똑하고 괜찮은 아이들이야. 1교시부터 7교시까지 한결같이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은 어른인 나에게도 힘든 일인데 잘 듣고 참여하려고 애쓴 모습 너무 대견했다. 때론 힘들고 하기 싫을 때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애써 준 너희들 다 기억해. 어떤 활동이든 게임이든 최선을 다해 참여하고 잘 듣고 시험공부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어. 무슨 일에든 끈기를 갖고 끝까지 해내는 노력은 정말 값진 것이거든. 너희들의 보석 같은 노력, 잊지 않을게.
앞으로도 그 모습 잃지 말고 끝까지 좋은 모습으로 지내자. 수고했다!
Keep my fingers crossed for you!!
With love
아이들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내 목소리를 경청한다. 그리고 수업에 대한 소감을 적으라고 남겨둔 빈칸에 뭔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한다. 교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나는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 마치 성적표를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수업종이 치고 몇몇 아이들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못쓴 사람들은 다음 시간까지 써서 내라고 말하고 다 쓴 아이들의 학습지를 걷어서 설레는 마음으로 교무실로 내려온다.
깨알 같은 내 삶의 증인들
눈앞에 불꽃이 오색찬란한 빛을 내며 밤하늘에 터지는 불꽃놀이처럼 혹은 팝콘이 팡팡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는 기분이 이런 걸까. 아이들의 글을 읽는 동안, 전자레인지에 돌린 팝콘이 터지는 것처럼 내 마음도 기쁨과 기특함, 뭉클한 감정들이 툭툭 소리를 내며 터진다.
항상 저희를 먼저 생각해 주시고 선생님의 밝고 쾌활한 성격 덕분에 영어시간이 더 재밌었던 것 같아요.
가장 존경스럽고 기억에 남는 한 사람
수업이 재밌어서 최대한 졸지 않고 들으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영어를 좋아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밝게 수업해 주시는 모습이 좋았어요.
뒤처지는 아이들까지 이끌고 가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참된 선생님이라고 느꼈어요.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선생님의 조언 덕분에 일어난 것 같아요.
사춘기 중3이라 수업 중에는 거의 반응이 없었다. 민망하긴 했지만 최대한 웃으며 농담도 하고 활동도 이끌었었다. 가끔 무표정한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내 얘기를 잘 듣고 있는지 수업이 잘 전달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었는데 아이들의 빽빽이 적어낸 편지를 보면서 내가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은 오히려 내 수업을 매 시간 보고 듣고 느끼면서 온전히 흡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과연 내 작은 노력과 시도의 증인들이었다. 나는 혼자 27~30명이 넘는 아이들을 보지만 반대로 그 많은 수의 아이들이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눈으로 날 지켜본 내 인생의 관찰자들. 그들의 편지에 나는 감동했고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생기부에 담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진심이 깊숙이 내게 전해지면서 뭉클해지고 만다.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볼 수 있다는 거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어린 왕자, 21장)
지구에서 만난 여우는 장미를 소중하게 만든 건 장미를 위해 왕자가 소비한 시간 덕분이라 했다. 그 말처럼 내가 아이들을 위해 소비한 시간만큼 아이들은 나를 똑같이 지켜보며 그들의 시간을 나에게 소비했다. 그렇게 우린 천천히 스며들었고 길들여졌다.
일 년에도 몇 번씩 아이들이 쓴 글을 수행평가로 보고 읽어서 그들의 글씨체에 익숙해지고, 일주일에 네 번씩 아이들의 얼굴을 보게 되니 그들의 표정, 머리모양, 말소리, 걸음걸이, 같이 노는 친구들까지 모두 기억하게 된다. 이름은 맨 나중에 외워지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아이들의 특징은 깊이 새겨진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과 섞여있어도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어린 왕자가 그 많은 꽃들 속에서도 자기의 꽃을 금방 알아보는 것처럼, 길들이는 것은 이렇게 오랜 시간과 애정, 관심을 필요로 한다.
헤어짐을 준비하다
곧 졸업할 3학년아이들.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할 일은 더 잘 가르치는 것뿐이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부터 챙긴다. 인사만 잘해도 생기부는 훨씬 좋아진다고 잔소리하고 효율적으로 공부하고 쉬는 법, 기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는 법, 바쁜 일정 속에서도 건강을 지키는 법 등등 인생의 작은 팁을 하나씩 정성스럽게 전한다. 더 큰 물, 고등학교라는 바다에 나가서 더 잘 헤엄치고 나아가길 바라면서. 핵심 문법과 단어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쓰고 말하고 익혀서 서로에게 설명하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하도록 한다. 그것은 내가 길들인 아이들에 대한 내 마지막 책임이고 선물이다. 아이들은 그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매시간 맡은 역할을 충실히 다 해냈다. 그리고 어느새 의젓하게 성장했다. 이제 각자의 별을 찾아 나서도 될 만큼 단단하게
사람들은 이 진실을 잊어버렸어....
네가 길들인 것에 넌 언제나 책임이 있어.
(어린 왕자,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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