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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Feb 18. 2024

방울의 일탈

발신자 미정으로부터 십 년 만에 도착한 메시지였다. 딸깍 울리는 우주의 알림처럼 무엇이든 알려줄 법한 골동품을 펼쳤더니 살아있는 목소리가 좁은 방구석을 타고 흘렀다. 찜질방에 가고 싶어. 한동안 왕래도 없던 그 애의 뻔뻔함에, 잊었던 그리움의 초가 눈을 번쩍 뜨며 불을 밝혔다. 환해진 배경이 어색하여 네가 보낸 종이를 구겼다. 나는 그것을 몇 번 조물거리다가 건조한 입 속으로 욱여넣었다.     


우리가 흘렸던 땀을 떠올렸다. 서로의 맹세는 십 년 단위로 딱 나눠 떨어졌다. 떠나가는 시간과 노력이 무색하게 인연은 가볍고 연했으며 반면에 끊어지는 속도는 열정적이었다. 미정과 나는 구운 달걀 세 개를 들고 있었다. 식혜를 곁들일까 고민하는 와중에 그 애가 내게 물었다. “뛰어내리면 다시는 못 보겠지.” 나는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탈출은 금기와도 같아. 아버지가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기억을 되짚어 보면 우리는 자매였을 것이다. 만약 아니라면 남매였을 것이고, 거꾸로 생각하면 일면식도 없는 남이었으며 종국에는 사랑하는 연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관계가 땅바닥에 널려있는 이곳은 뜨거운 멸망을 꿈꾸고 있다. 뉴스에서는 불안과 행복에 대한 인터뷰가 번갈아 보도되었고 우는 사람과 웃는 사람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손을 잡은 모습이 비쳤다.    


집이 없다고 말하며 입을 열어 활짝 웃는데 한쪽에서는 꽃이 나오고 한쪽에서는 거미가 나왔다. 거미가 꽃에게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끝으로 도로의 모든 전기가 폐쇄되었다. 기술자는 너무 멀리 있었고, 그치지 않는 지독한 폭설에 사람들은 몸살을 앓았다.     


너는 찜질방에 가고 싶다는 말을 전에도 한 적 있었다. 이른 나이에 이뤘던 네 결혼의 행운을 빌던 보통의 날, 너는 이혼을 위해 변호사를 만난다고 했다. 그 역시 십 년만의 연락이었으며 나는 네 전화를 받고 난 뒤, 다음 연락이 또다시 십 년 후가 될 것이라는 걸 짐작했다. 그땐 꼭 같이 땀을 흘리자는 대답은 들려주지 못했다. 이곳이 빠르게 흘러서 녹아버린 버터처럼 사라진다면 우리는 다른 형태로 둔갑해 늦은 사랑을 말하게 될 것이었으므로.      


미래의 약속은 먼저 꺼내는 사람이 책임을 져야만 했는데, 나는 감당할 돈도 여유도 없었다. 너와 함께 대중목욕탕에서 서로의 등을 밀어주는 감각만 떠올렸을 뿐인데 촉수가 켜진 듯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이따금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이 시공간에 갇힌 메아리의 형태로 주변을 맴돌았다. 긴 시간 끝에 지친 모습으로 돌아올 네 연락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언제까지 미루고 미루기만 할 일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촛불들이 줄지어 서있는 횡단보도에서는 익숙한 멜로디가 울려 퍼졌고, 밤새 모르는 기도가 이어졌다. 자세히 들어보니 말을 거꾸로 외는 거푸집 같았다. 나는 미정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면서. 이제는 내가 그 애를 책임져야 할 순간이 온 것만 같다고.      


초록색 햇살이 나무에 닿자마자 으스러졌다. 자전거도로에 자전거가 된 사람들이 쫓기듯 걸었다. 찻길에는 동물들이, 인도에는 뼛조각의 잔해가. 밤이 되면 그것들의 몸을 빌려 잠시 쉬어갈 수 있었다. 큰 도로를 지나서 낡은 골목을 꺾어 돌면 까만 창문이 다닥다닥 줄 선 찜질방이 있는데, 오늘밤은 그곳에서 머무를 것이다. 어쩌면 옛 기억을 되살려 어리고 예뻤던 미정이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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