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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Jan 31. 2023

캐스팅 교체

이번 글이 펑크 나서요, 다음 글 구해주세요.

원래 오늘 올리려던 글은 이 글이 아니다. 다소 행복에 겨운 마음으로 글감을 조금씩 주워 담고 있었으나, 어떠한 연유인지 잘 써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문장이 어긋나고, 적절한 단어를 끼워 맞추기 어려웠다. 그러다 주제의 감정을 바꿨더니 이상하게금세 낯이 익어졌다. 내내 모르는 사람처럼 새침하게 굴더니, 이제야 좀 아는 사람 같다. 좋은 교훈이 담긴 글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내 손에 맞는 장갑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녀석들과 동침 중이다.     


내가 이 글을 적게 된 이유는 불현듯 찾아온 불청객 때문이다. 불현과 듯이 저절로 띄어쓰기 되는 한글 시스템처럼, 내 의도대로 이뤄지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침울했다. 물론, 그 불청객이 겁도 없이 우리 집으로 찾아온 건 아니다. 그 녀석은 시시각각 바뀌며 원인 모를 진폭이나 진동으로 자주 두들겨지는, 내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아시다시피 나는 그를 초대한 적이 없다. 초대할 생각 또한 추호도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감정은 꽤나 낯설었다. 너무 낯설어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근육이 하나도 없어진 기분이었다. 과장을 보탠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서 등을 돌릴 때에 느끼는 기분과도 흡사했다. 나에겐 아직, 해결하고 싶으나 혼자 힘으로는 이겨내기 어려운 일이 남아있다. 떠올릴수록 숨이 아득해진다.  


이 글이 한낱 일기 조각으로 그치게 될까 봐. 솔직하지도 못할 거면서, 모자라고 답답한 이야기를 괜히 소중한 분들에게 옮기는 것은 아닐까 두려운 감정이 앞섰다. 그럼에도 마음의 회한 같은 것이 조금은 휘발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나는 쓴다. 아마 그분들 또한 가슴에 태평양 하나씩 품고 계신 분들이니, 철없게 구석진 일상 하나도, 너그러이 바라봐 주실지 모른다는 기대와 바람 같은 것을 믿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비 오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을 때, 실제로는 날씨가 좋은 날 촬영한다는 말이 있다. 자연의 섭리를 인간이 거스를 수 없듯이, 보다 자유로이 계절의 순환을 활용하기 위해, 손아귀에 쥘 수 있는 날들을 선택하는 것이리라. 비슷하고도 다른 경우로, 슬픈 멜로디에 어울리는 작사를 할 때, 이별 직후에 쓰는 것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감정 과잉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슬픔에 누구보다 깊게 젖어서는 안 되므로.     


그런데 나는 이따금씩 나 혼자 울어버리는 글을 쓰곤 한다. 지금도 해당되는 중인지 모르겠다. 그런 글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자꾸만 누군가에게 마음을 알아달라 외치는, 호소의 글투와 하소연의 기호들이 글 전체를 꽉 붙잡고 있다. 유명한 배우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연기를 할 때, 나 혼자 슬퍼하면 안 돼요. 내가 너무 슬픔에 빠져있으면, 관객이나 시청자를 초대할 공간이 사라집니다. 나를 봐줄 유일한 사람들을 초대하지 못하는 것. 이 역시 감정 과잉 때문일 거다.      


연기자라는 이름은, 누군가에게 감동을 전해야 하는 숙명을 지녔기에. 그 감동을 홀로 만끽하려면 방 안에서 슬픈 영화 여러 작품을 감상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알려줘야 하는 것일까.     


그런 측면에서 나는 되도록 감정이 절제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멀리 떨어져서 나를 비춰볼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런데 그래야만 한다면, 마음이 아픈 내 모습과 함께일 때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 이미 나 혼자 너무 슬퍼하는 상태라서 그렇다. 내 감정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아려서 다른 이가 들어올 작은 틈조차 막아버리 말 것이다. 나는 괜스레 억울했다. 마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이것저것 꼬투리 잡힌 선량한 것들이 모여, 신경질을 돋우는 데 보탬이 되는 것처럼. 이런 권태는 내가 나에게 억울해질 때 느끼는, 이상하고도 말도 안 되는 아집 같았다.   


큰 사건을 겪었을 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정심을 되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많은 풍파를 끌어안고도 그 자리에 머무를 단단한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일면식이 없음에도 고마움이 느껴질 지경이다. 버텨줘서 고맙다고 경쾌한 존경의 눈길을 보내고 싶다.


때때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의 실체들을 담을 수 없는 그릇 때문에 속이 상하는 날이 있었다.     


삶이 갈피를 잡지 못할 때에, 나는 생각했다. 다른 누구의 말마따나, 그때 그러면 안 됐던 건가, 어떤 이가 했던 말을 거스르지 말고 깊게 새겼어야 했나. 다시 돌아보는 게 맞았나. 늦게나마 후회하며 부질없는 상념에 젖었다. 지금의 글은 곧 지나치고 말아 버릴, 하나의 바람에 그치지 않는 것들. 그저 울어버리고 싶을 때 엎드려 울기 위한 상. 애초에 나는 이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나 싶다. 그럼에도 주절주절 무언가를 적어야만 나아지는 기분이 든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친했다고. 그것들은 첫눈에 반해버린 사랑처럼, 내가 영영 벗어나지 못하도록 끊임없는 구애를 펼쳐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 저렇게 해야만 한다는 말. 지금은 잘 모르겠다. 슬플 때 슬픔이 가득 담긴 글을 적지 말아야 한다면, 나는 슬픔을 날릴 다른 묘수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싫어졌다. 이 또한 나만의 방식으로 삼고 싶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저런 사람도 있는 것처럼. 당신의 삶이 어딘가 위태로워 보일 때, 나는 이 글이 두서없는 위안이 됐으면 한다. 저렇게 얼토당토 없는 글을 적어서 올리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왜 못해! 하면서 의지를 북돋았으면 좋겠다.      


맞다, 나는 지금 나 자신과 누가 시키지도 않은 내면의 결투를 벌이는 중이다.     


그냥 내가 쓰고 싶을 때 글을 쓰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서

오늘도 굶주린 마음을 끌어안고 나는 쓴다.     


또 다른 이유로 아파할 누군가에게, 

작은 안도가 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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