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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Feb 05. 2023

당신이 열렬히 사랑했다는 증거

사랑과 아픔의 크기는 비례한다.

또 깨졌다. 벌써 몇 번째인지. 서늘한 뒷덜미를 움켜쥐며 잠에서 깨어나니, 비로소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간절히 소망하던 물건을 구매한 뒤엔, 반드시 꿈에서 그 물건을 깨트리고야 마는 특이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꿈에서 꿈인 줄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래 니들 원하는 대로 해봐라 어차피 꿈이니 나는 동요 않는다 하며 그들의 놀이에 장단 맞춰 줄 의향까지 있는데도. 그들은 나를 완벽하게 속여 가며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공포의 연극을 펼치곤 했다.      


더 어릴 적엔, 몇 달을 기다리던 최신형 핸드폰을 품에 안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나는 자꾸만 그것이 깨지는 꿈을 꿨다. 황홀한 광야를 드러낸 품이 홍해 갈라지듯 쩍쩍 금이 가는 것을 두 눈으로 직면하는 심정이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 심장이 두 동강 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분명 꿈에선 아픔을 느낄 수 없다고 했는데, 그마저도 나에겐 사치인 듯했다. 몸의 고통은 통제 가능한 관할인지 모르겠으나, 마음의 고통은 무엇으로도 달래지지가 않았다. 그저 악마 같은 꿈의 속삭임에서 벗어나야만 모든 방랑이 끝이 났다.     


예전엔 주로 사랑하는 물건을 잃었다. 그런데, 점차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 대상은 바뀌어 갔다. 내 감정을 치밀하게 연구하던 그들은, 매번 비슷한 나의 고통과 반응 패턴이 지루해졌는지 더욱 과감한 수법의 장난을 건네기 시작했다. 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앗아가는 일이었다.     


주변에 있던 것들은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내 곁을 떠나 있었다. 아끼는 마음이 짙어질수록 잔인한 행위는 더욱 심해졌다. 꿈에서 본 사촌 동생은 십몇 년 거슬러 올라가 다시 아기가 되어 있었다. 동생이 아기가 되었는지도 모를 만큼 나는 무지한 상태였다. 밖에 나가 뛰어놀고 싶어 하는 아이를, 바쁘다는 핑계로 모른 체했다. 낯선 사람의 반가운 미소에 홀려 그 아이를 맡겼고, 이후로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찾아 한참을 헤매었다. 어느 곳에서도 두 번 다시 아이를 만날 수 없었다.    

 

그들이 악질이었던 이유는, 내 마음에 죄책감을 심어주기 때문이었다. 내가 잃는 모든 것들은 철저히 나의 실수가 저지른 결과였다. 그러므로 누굴 탓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 고난의 이슬로 흠뻑 젖어있는 베갯잎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꿈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어떤 것을 깊게 원할수록 집착이라는 녀석은 우리의 마음을 쉽게 점령해 버린다. 사랑이라는 종족은 태초부터 불평등한 것이므로, 그 감정을 깊숙하게 느끼는 사람이 더 손해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아파하는 모습마저 순결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더 많이 사랑해 본 사람만이 진한 애정의 향수를 알아챌 수 있듯이. 사랑으로 인한 크나큰 생채기는 그것을 감당해 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아름다운 훈장이 되어주기도 한다.    

 

누군가를 잃고 나서 겪는 아픔이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고통이라 한다면, 전에 만났을 사랑 또한 세상의 모든 빛깔을 품고 있었을 테니. 사랑엔 이별이 따르고, 만남엔 헤어짐이 따른다. 어차피 없을 영원이라는 것을 걸고, 우리는 끝이 뻔한 체스 경기를 펼쳤다. 혹시 모를 순정의 기대감을 품고서 말이다. 무형의 형체를 그렇게도 열렬히 원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늘에게 선택받은 이들만 누릴 수 있는 천상의 감정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유독 깊은 아픔을 오래도록 느끼는 사람이라면, 부딪히는 사랑 또한 남들과 다를 것이라 생각해 보면 어떨까. 등가교환처럼, 사랑 또한 그 총량에 합당한 대가를 주고받는 것이 이치일지도 모르니. 말로 표현 못할 상처를 감내하고 나면, 또다시 찾아올 새 인연은 눈부실만큼 뜨겁게 달뜬 찬란함이지 않을까. 우리는 원래 그런 사람들이니까. 이 땅에 사랑하기 위하여 태어나, 서로에게 목매여 웃고 울기 위한 정갈한 몸짓을 지녔으니까. 쏟는 감정이 아깝지 않은 자랑스러운 사람들이기에.      


온갖 이별과 헤어짐으로 멈춰있을 시간의 조각이 실컷 웅덩이를 만들고 나면, 틈을 채우고도 넘쳐흐르던 마음들은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고대하던 빗방울로 떨어져 구석구석 메마른 흔적을 적셔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롱하고도 투명한 무지개를 띄우며 귀천 없는 마음들을 안아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다지도 사랑스러운 당신을 위해. 두 손 모아 가슴 깊 응원의 시를 읊어본다.


부디 새로이 일어날 수 있길.

다시금 열정의 감정을 펼쳐 연모라는 싹을 틔워 나가길.

당장 눈앞에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빛나는 것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쓰러져 있을 많은 그대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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