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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Feb 07. 2023

나부끼는 용기 너머로

자유의 나는, 망설이지 않음에서 시작된다.

잠들기 전, 침대 위에 누워 몸을 뒤척이는데 문득 마음에 드는 문장이 떠올라 사방 달뜬 홍조로 일렁였다. 그 시작을 기다렸다는 듯이 문장들 서로의 꼬리를 잡아먹으며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였다. 오랜만에 맞이한 흥미로운 순간이었다. 그런데, 어느 쪽이 승자가 될지 골똘히 탐구하던 단상들, 일순간 취를 감춰버린다. 꼼짝 않는 스스로가 문제였다. 갓 태어날 준비를 마치고 숨을 몰아 쉬던 그들이 세상 밖으로 잉태하기만을 남겨둔 시점에서. 내 게으른 심신이 새 생명들을 전부 망가뜨리고 말았다.     


내 안의 상념이니, 어디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의 힌트만 찾으면 또다시 깨워낼 수 있을 거라고 합리화하며, 나는 죽어서 이뤄도  한 숨의 잠에 모든 이유를 맡겼다. 그저 피로를 푸는 게 급선무였다. 몹시 안일한 태도였고, 그렇게 맞이한 결과는 처참했다. 전날 털어 넣은 식사 메뉴도 기억 못 하는 내가, 모래알 같은 아스라한 문장들을 기억해 낼 리가 만무했으니. 내가 바라보는 내 모습은 꽤나 영특한 모양이었다. 그때의 일에 크게 뒤통수 맞은 후로, 나는 거의 모든 무언들이 떠오르는 순간 펜을 들려고 노력한다.     


말에는 형체가 없다. 고유의 향기가 있다고 했으나, 아직 일정 부분의 경지까지 도달하지 못한 나는, 에서 향을 맡기는커녕 그곳에 묻은 먼지 닮은 기억조차 되살리는 일도 잘 해내지 못한다. ‘어떻게든 되겠지’의 거침없는 용기는 때로, 긍정의 기적을 갉아먹기도 하기에. 하나의 결정을 두고 오랜 기간 유예하다 보면, 그때의 감정과 열정은 보이지 않는 연기가 되어 사라져 있었다. 마치 나에게 없었던 일처럼, 한 여름밤의 꿈 같이 생경해졌다. 그럼 또 이렇게 생각했다. 내 인연이 아니었던 거라고.     


인연은 누가 정하는 걸까. 보통의 기회들은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 않던가. 잡아야 하기에 기회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을까. 너무 깊은 고민은, 결과를 늦출 뿐이었다. 성급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 확신의 인사가 찾아왔다면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 한다. 지금 바로, 당장 하는 것이 상책이다. 막연한 고민은 용기만 잡아먹을 뿐. 그렇게 잡아먹힌 용기는 나에게 되돌아오지 않고 결국 후회를 안겨준다. 나 또한 숱한 후회 속에서, 원치 않는 내리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듯이. 머뭇이라는 것은, 성장이란 씨앗에게 치명적인 걸림돌을 선물하곤 했다.   


한 편의 글을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나태한 몸이 이끄는 대로 잠깐의 단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조차 억울하리만치 억척스럽게 일만 해대는 내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웬 점쟁이 하나가 나타나더니, 내 옆 사람의 인생 앞에서 예리한 촉을 세우며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덩달아 목젖이 뻐근하고, 마음이 긴장되었다. 식은땀이 한 방울 턱끝으로 흐르던 중에 내 차례가 오자, 경직 몸을 가까스로 분리하여 고개를 돌렸다. 목석이 되어버린 나에게 그가 단호한 투로 말했다.      


너는 참 복이 없어, 너도 알지?      


일순간 힘이 터억 빠지고, 사지에 맥이 풀렸다. 나는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번호표를 뽑아 이곳에 앉아있단 말인가. 남들은 하고픈 것 이루려고 들어간다는 그 환상의 세계에서도, 나는 잿빛 망을 맛보고야 말았다. 현실보다 현실 같음에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넋이 나가있는 내 몰골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가차 없는 그 양반은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그러니까, 너는 열심히 살아야 되겠지?     


꿈에서 깨자마자 나는 생각한다. 글을 미루지 않았다면, 한낱 잠에 혹하지 않았다면, 허구 속 점쟁이에게 악담 같은 말은 듣지 않아도 되었는데. 오롯 나 자신만의 원망과 슬픔을 앞날에 내던지며, 주어진 세상을 부정하려 했다. 어떻게 내 일생을 통달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엄청난 각성 효과를 안겨준 그의 말마따나 나는 복이 없으니 불철주야 업에 몰두하는 수밖엔 없었다. 그것이 곧 내가 감당할 설움이었다. 포기릿속은 사치였고, 눈물 훔칠  배부른 소리였다. 손을 훑고 지나가는 무수한 도전들 앞에서 내 지난날은, 민들레 홀씨 하나 제대로 못 날릴 법한 얕은 바람결에 힘없이 엎어지기만 했다.      


더 이상 주저 하지 않는 오늘을 살 수 있다면. 그리하여 뚝심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천애 복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 다시 일어날 기회만 나에게 남아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부끼는 삶의 부표를 바라보다가, 어디로든 속절없이 달리고 싶어졌다. 박되지 않고 유유히 날리는 낱장의 손수건 같은 삶이기를 바랐다.


나의 주인은 나 자신 하나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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