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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Feb 09. 2023

[몽당 소설] 조용한 실종

그녀의 소원은 지워지는 것이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원고 작업으로 그녀는 이미 녹초가 된 후였다. 깨진 구슬 같은 인생을 들여다보자 온갖 뒤엉킨 글씨로 도배되어 있었다. 작고 힘없는 뿔테의 실오라기를 엮어가며 근근이 오늘을 먹고사는 것 같았다. 일이 들어오면 닥치는 대로 받아댔고, 그 덕에 그녀 삶은 하루가 다르게 검어져 갔다.      


이따금 그녀는 생각했다. 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고통스러운 계단을 걸을 필요까지 없었을 거라고. 자신에게 내려진 가혹한 삶을 저주라 칭하며, 숱한 시간들을 울음으로 흘려보냈다. 그녀의 은 더 이상, 청춘의 푸른 아우성을 내지르지 않았다.     


어제보다 조금 더 늙어진 기지개를 켠 그녀는, 성근 몸을 달래며 입 안에 발포 비타민을 털어 넣었다. 노란 가루가 식도를 타고 녹아내릴즈음, 탁상 위의 무드등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 자신이었던 어떤 이에게 받은 태양이었다. 바다나 우주 같은 시큼 달달하고 우스운 사랑일 적도 있었다. 몇 차례 다른 계절의 나무들을 짓이기며, 오랜 기간 스위치를 켜지 않았던 탓인지 꽁꽁 얼어있는 듯 보였다. 어둠을 머금은 그것은 그녀를 원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지난날이 불현듯 떠올라, 눈꺼풀의 짐을 살짝 풀어 두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싸늘한 그림자를 뚫고, 문득 바닷소리와 비슷한 느낌의 환청이 일었다. 그녀는 느릿하게 창가 쪽으로 시선을 내둘렀다.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얇은 통유리 외벽을 사이에 두고, 옅은 바다의 몸체가 짠 내음을 풍겨왔다. 어린 물살과 노쇠한 바람은 서로를 알아봤는지, 설움을 호소하며 부딪히고 부서지고 있었다. 기어코 찾아왔구나, 언젠간 꼭 만나러 가겠노라 다짐했는데.     


아스라한 주황빛 조명이 낡은 형태로 반짝이자, 그녀의 코끝에 마른 나뭇가지 냄새가 닿았다. 퀴퀴한 향이 육체 구석구석을 감싸 안는 듯하여 소름이 돋았다. 모닥불이 일렁이는 동안 바다는 계속 그녀를 불렀다. 애절한 떠돌이의 눈빛을 달고, 단 하나의 몽둥이 같은 몸으로 후광의 단내를 내리쬐었다.   

   

이제 그만 쉬어도 된다며 채근 대는 울림에,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떠올랐다가 내려갔다. 알맹이를 잃어버린 노란 비타민 껍질이 굴러다니는 모래사장을 향해, 그녀는 발자국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결심이었다.

   

사그락 사그락, 그리운 광경이 그녀를 안았다. 한 번도 지나온 적 없는 이상의 추억이 흐릿하게 그려졌다. 지금 당장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마음속 불안은 성화를 등에 업은 채 이미 뒷골목으로 사라진 뒤였다. 그녀에게 이상하리만치 커다란 용기가 샘솟았다. 주저하지 않아도 되는 배경 앞에서, 연푸른빛 사람들의 손짓은 적극성을 띠었다.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며, 자신의 손과 발을 줄여나갔다. 그들은 갈수록 투명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까맣게 타오른 내면의 본성이 신랄하게 드러날지도 몰랐다.    

 

희끗한 모래알들은 물결 틈새로 자꾸만 떠밀려갔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울 것 같았는데, 어쩐지 하나도 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이로 우리의 낯선 첫 모습을 기억하는, 낯익은 얼굴이 빛나고 있었다. 은빛 점들이 무수한 바람에 나부끼고, 그녀의 잠옷에 달린 사랑스러운 바짓단이 먹먹하게 젖어드는 줄도 모른 채. 그녀는 그녀를 동경한다는 외로움의 파도에 몸을 맡겼다. 그림 안의 여자는 그렇게 실종되었다. 짙푸른 파고가 잠잠해진 그곳엔, 살아있지 않은 숨소리만이 사경을 헤매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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