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게 지워준다고 해도

지우지 않을 것 같은 일들.

by 블루나잇

그곳에선 일면식도 없는 울음의 비린내가 풍겨난다. 짠 미소를 가득 머금은 기름때가 섞여있고, 사유의 날파리들이 윙윙대며 순간마다 생을 마감한다. 우리에게 그곳은 그런 곳이었다. 온갖 울고 웃는 집합체들이 맵고 시원하고 노르스름한 뭉텅이의 결정체로 찌들어있는 곳. 그토록 오래된 냄새를 제 발로 찾아가게 되는 곳. 비로소 간신히 유지하던 몸때를 벗어내고 번듯한 프랜차이즈 편의점이 되어버린, 집 앞의 작은 호프집에 대한 이야기다.


몸을 뉘일 아지트 같은 공간이 있어야 인생을 살기 수월하다고 했다. 집이라는 울타리와 다른 개념인 것 같았다. 산더미처럼 커버린 몸뚱이를 어느 곳에도 감쪽같이 숨길 수는 없겠지만, 내 눈을 살짝 가리고 내 가족의 옅은 입김을 더하면, 그곳은 더할 나위 없이 환상적인 은둔처가 되곤 했다. 사람들의 혼과 각자의 사정들을 거름 삼아, 매일같이 따가운 갑옷을 껴입은 닭을, 포근한 위로를 세상에 내놓던 작은 우주별. 우리는 그곳이 사라진 뒤에야 알게 되었다. 돌아보아도 없는, 이제는 진정으로 사라져 버린 소중한 공간이었다는 것을.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에도, 어느 초여름 시원한 목 넘김으로 불쾌지수를 씻어버리고 싶었을 때에도, 추운 몸을 찬 알코올로 소독하며 감당해야 할 아픔을 모른 체하려 했을 때에도, 우리 세 식구가 현실의 밖에서 서로를 행복으로만 바라보고 싶었을 적에도 말이다. 그곳에서 허공에 내뱉어진 고민을 어루만지는 것은 연례행사와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냉철한 신의 부름은 언제까지고 우리가 그곳을 당연히 지겹게 여기도록 두지 않았다. 빼앗으면 그리움에 사무치겠거니 싶을 때, 그곳으로 통하는 벽을 허물어버렸다. 주위를 둘러싼 도시의 배경이 온통 살풍경함으로 물들었다.


아쉬운 습관이 들었는지, 예전의 그림자가 잠들어있는 그 길목을 지날 때면 먼발치 서있던 영혼의 우리와 마주한다. 몸이 저절로 그것을 찾아 일별 한다. 바라보고 나면 닫혔던 생의 틈이 또 열린다. 얄궂게 장난치듯 내 안의 심란함을 주억거리며 논다. 그러나 나는, 한동안 너에게 머물다가도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더 곱씹어봤자 나만의 환상일 것이었기에.


모든 그리운 것들은, 어쩌면 수없는 헤어짐 속에서 존립하는 걸까. 초심을 거두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함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때에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봐야만 알게 되는 악독한 순리인 것일까. 막상 그 모습을 되찾는다고 해도 열렬한 감흥이 잠시이고 한때에 머무를 것임을 안다. 이내 언제나처럼 지긋해지고 금방이라도 잊힐 것을 안다. 그럼에도 현재의 심정은 그저 떠나버린 것을, 이제는 곁에 없는 시간들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온 세상 흩어진 아름다움을 모아서 전부 쏟아부을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생각하면서.

일상의 크고 작은 살아있음을 사고팔아 대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 우주별이었던 편의점으로, 나는 겨울이 되면 종종 군고구마를 사러 갔다. 마주할 때마다 그곳은, 나라는 존재를 전혀 기억해내지 못했다. 마치 사고로 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었을지도 모를 옛사랑처럼, 순수하고도 깨끗한 형상으로 서있었다. 무거운 상념의 짐을 떠안지 않은 채로 온전히 편안해 보였다.


모든 만남과 초면이 희한하게 결합되는 그 안에서, 오직 그의 과거를 알고 있는 나만이, 밀려오는 추억의 결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버스럭거리는 눈송이를 밟기 위해, 그만두고 싶어서, 씁쓸함을 씹으며 그를 떠나왔다. 새로운 기억이 창턱 너머로 쌓이고 있었으나, 몹시 희어진 눈이 내릴 때마다 또다시 지워지는 듯했다. 찬바람이 촘촘한 공기들 사이에서 방심하는 틈을 타, 따사로운 기운이 온기를 되찾는다고 해서 되돌릴 수 있는 일은 아무래도 아니었다.


있는 것들에 매사 감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다. 후회를 반복하는 행위만이 사랑의 증거로 남았듯이. 더 깊게 애정할수록 잊는 능력이 더딘 사람일수록, 길 잃은 마음에게 쉽게 잡아먹힌다. 미련 없는 이별은 없다. 기다림은 문득, 언제나 재발할 수 있는 것. 이쯤 되니 관계에 있어 최선을 다하는 것과 아프지 않은 것은 별개인 듯싶다. 사람은 진취적으로 살아야 한다는데, 나는 자꾸만 과거에 발목이 묶이고 지난날의 쇠사슬에 여러 정신을 감금시킨다. 이제 그만 나와야지 하면서도 무언가에 씐 듯 정신 차려보면 그곳에 서있다.


누군가의 마음에 갇혀 언제까지고 지워지지 않는다는 건, 아직 생이 끝나지 않은 것들을 온 맘 다해 기리는 최후의 애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모든 마음이 끝날 때까지는, 그냥 이대로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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