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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Mar 14. 2023

[몽당 소설] 찬밥

우리의 생이 굳어갈 때.

우리 엄마는 꼭 온다고 말했어.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니까? 하얗고 거뭇한 타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나지막한 만남의 광장을 이룬 모습이었다. 대화를 슬쩍 엿들으니 아이의 연령으로 감지될 법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대개 자신이 버림받지 않았음을 피력하는 중인 것 같았다. 굳은 믿음과 바람은 공기를 타고 한동안 유영하다가, 말을 꺼내는 스스로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면 그들은 제가 낸 소리인 줄도 모른 채 사랑하는 이를 닮은 익숙한 멜로디를 위로 삼아 남아있는 희망을 부풀려 나갔다. 누구도 알려준 적 없었지만 기대를 놓는 순간 모두 끝이라는 것을 이미 아는 듯했다. 짙은 기다림을 뚫고 옅은 불안의 확신이 스멀스멀 들어차는 순간에는 문득 화두가 바뀌어 있었다. 그들에게 불과 얼마 전이었을지 모를 옛 추억이란, 서늘해지는 성에 같은 몸체를 애써 외면하며 따스했던 과거를 어슴푸레 떠올리는 일이었다. 살아있는 시간을 늘려줄 가장 쉽고 효과적이며 간단한 수단이었다. 두런두런 눈치를 살피던 보랏빛 아이가 조심스레 서막을 열었다. 우리 부모님은 온화한 분이었어. 어머니는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로 나를 안아주었고, 아버지는 성실하고 단단한 생활을 일구어 나가는 분이었지. 나는 작은 말썽도 부리지 않으려 노력했어. 우리 부모님을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 서로의 마음으로 키워낸 실재인지 꿈인지 모를 갖가지 어휘의 퍼즐을 조합하다가도, 결론은 늘 현실 부정으로 끝맺음되었다. 나는 절대 버림받았을 리 없어. 그렇게 모두의 눈망울이 잔뜩 침울해진 대화의 종국에는,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표를 스스로에게 되묻는 지경까지 당도했다. 내 부모는 대체 왜 나를 두고 간 거지? 내가 가끔 신상 인형 놀이 장난감을 사달라고 요구해서? 놀이터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왔을 때 손발 씻는 것을 깜빡해서? 푸르뎅뎅한 시금치 반찬이 싫다고 꾀를 부려서? 자신이 낙오된 이유가 고작 어린아이가 부린 티끌만 한 투정 때문이라면 정말이지 너무나 서글퍼질 것 같았다. 아무리 곱씹어도 두고 간 어른의 속뜻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부모가 일이 바빠 자신의 안위를 잊을 때도, 다른 관심사가 생겨 일주일에 한 번 놀아주는 것조차 미룰 때도, 어느 날 자신이 잠든 후에 어디론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을 때도. 그 어느 순간에도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모른 척 눈감아 주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기로 했다. 착한 아이로 살겠다는 신념을 가졌으면 가졌지, 이렇게 무자비하게 내놓아지는 경우의 수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그야말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을 무계획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것도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됐을. 어른들의 세계는 기하급수적으로 복잡고 어려웠다. 감히 그들을 이해하려 했던 벌을 이리도 가혹하게 받는 것일까. 수많은 고민에 휩싸인 탓인지 아이들의 집중력은 현저히 떨어져 갔다. 그저 자신들이 하루빨리 비좁은 공간에서 구출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애매한 온기가 넘나드는 낯선 집에서 아이들은 점점 굳어지는 몸을 양 팔로 가다듬었다. 과학 시간에 배웠던 것처럼 체온을 끌어올리기 위해 서로를 끌어안아댔다. 버텨야만 한다고 되뇌면서 주변의 자신들을 바라보았다. 상태는 다를 바 없어 보였으나, 그중 외피가 심하게 딱딱해지며 퍽 굳세게 변한 녀석들이 있었다. 비릿한 공기와 유독 자주 맞닿은 모양이었다. 한번 맺힌 생채기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거칠고 단단한 돌덩이가 되어버리는 무리를 곰곰 생각하다가 어느 날 방관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모두가 비슷한 신세였으므로. 누가 더 불쌍하고 덜 불쌍한지를 겨룰 처지가 안 되었다. 간혹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듯했고, 이따금 시린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눅눅한 낙엽 냄새가 축축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오늘의 계절이 가을은 아닐까 하는 추측 정도만 간신히 가능했다. 무서우리만치 몸덩이가 불어난 시간의 흐름은 가늠이 어려웠고, 수시로 어느 하얗고 거뭇한 아이들이 조금씩 뜯겨 나갔다. 저들은 부모를 찾게 된 걸까. 이쯤 되니 그대로 머무는 편이 안전한 상황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또 다른 이름 모를 곳에 맡겨질 것이 매서웠고, 두려웠다.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몸체가 굳어지는 속도는 더욱 가속화되는 듯했다. 대체 무엇을 원망해야 할지, 지닌 힘이 하나도 없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야속하다는 감정을 쥐고 있어도 괜찮은 건지. 발가벗겨지듯 부끄러운 속력으로 염치의 수증기들이 송골송골 피어올랐다. 이따금 바깥세상으로 탈출을 감행했던 아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돌아오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아직 남은 몇몇의 우리들만이 미래를 알지 못해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중이었고, 나를 포함한 그들은 얼마 뒤 추운 냉동 창고 같은 곳으로 옮겨졌다. 하루의 대부분을 눈 감은 채로 보냈다. 닥친 현실을 또렷이 응시하기가 겁났다. 이제는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누군가에 대한 기억도 없던 일처럼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눈꺼풀이 절로 주저앉고 뇌구조가 흐릿해지는 과정 속에서 그들은 자신이 누구였는지, 부모는 누구였고 사는 곳은 어디였는지 어쩌다 이곳에 왔는지 따위의 쓸모없는 과거들을 모조리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아주 조그마한 추억들까지도 머나먼 어느 경계로 떠나보냈다. 만약 이번 주 내로 누군가 그들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국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처분되고 말 것이다. 다시 환생하거나 그렇게 죽어버리거나, 아무도 그들의 보잘것없 허름한 생사에 관심 갖지 않을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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