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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Feb 28. 2023

[몽당 소설] 무제 관계

마땅한 이름을 짓지 못한 우리에게.

네 차의 조수석에 앉은 여자는 몇 명이나 될까?     


궁금하지도 않은 사정이 시끄럽게 뿜어져 나오는 스피커 속에서 흘러내리는 음표들의 마찰음이 커다란 파열음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어. 몹시 뒤집히고 엉켜서 연인들이 다투는 듯한 가삿말은 너와 나에게 퍽 익숙했잖아.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해 본 적 없다는 너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 주어야 할지 성근 나무 조각이 되어 고민던 날들이 있었어. 얇은 종이로 되살아나 너와 닮은 날카로운 펜촉을 머금고 싶다는 꿈을 꾸었거든. 찢어져도 괜찮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상상도 했던 것 같아.      


제대론 된 사랑까지는 언감생심이라 해도 비슷한 언저리의 끄트머리까지 가보고 싶었다 말하면, 너는 내 조악한 진심을 초라한 뭍에서 건져 올려줄까? 우리는 너무 오래 방치되어 다 해진 피난민의 옷을 뒤집어쓰고 그을린 누룽지 행세를 했지. 까슬까슬했고, 추웠어. 그런 우리가 같은 프라이팬 안에서 데워지려 했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었는데. 너도 알다시피 그땐 둘 다 너무 어렸잖아.      


처음이란 건 실수해도 괜찮은 거라며. 그런데 왜 우린 아무것도 인정하지 못했을까. 존중받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뾰족한 가시를 앞세우며 성난 자존심으로 으르렁대곤 했었지. 너를 잃은 첫 여름이었어. 하나의 숨을 잘근잘근 나눠 쉬고, 새하얀 솜털이 콧잔등을 간지럽히는 것만큼 보드랍게 곁을 내어주던 날. 이어폰 양팔을 반쪽의 귀에 심어주던 날. 누구 하나 익을세라 얄궂은 햇살로부터 손등으로 키운 지붕을 달아주던 날. 우리에게도 있었던 그런 말랑하고도 당연한 날들이 불현듯 떠올랐었는데. 


그렇게 심장을 꺼내어 손에 쥐어주던 때를 까마득하게 지우고서. 뒤늦게 깨달은 게 있어.   

   

많은 사랑을 나누는 것보다 중요한 건, 적은 상처를 남기는 일이라는 걸. 너는 나를 참 아낌없이 사랑해 줬지. 그런데 그보다 더 한 눈물과 기다림을 안겨줬던 것을 기억하니.     


아스라한 낙엽으로 버석거리는 웃음 한 구절 기록하기 위해 나는 네 옆에 존재하는 게 아니었는데. 어떻게 하면 네게 그저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했어. 너에게 특별해지고 싶다는 욕구가 검게 번들거리며 내 젖은 외피를 기어 올라오는 순간부터. 그때부터 우리 사이에 스멀스멀 음침한 먹구름이 끼어들기 시작했는지도 몰라. 그 흉측한 그림자를 너도 보았을까. 나는 조마조마했어. 사랑인 척 둔갑하고 있는 잿빛 넝마를 둘러쓴 악마를 들키고 싶지 않았어.    

  

인간은 참 어리석은 존재지. 쌓아온 무언가를 야금야금 마모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회갈색 모래알을 떨구며 서로의 집을 드나들었잖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유일한 그 흔적들을 가뿐히 즈려밟았잖아. 어떤 이는 기대가 더 큰 기대를 부르고 욕망이 진실을 삼켜버리는 순간을 조심해야 된다고 말했지. 기약 없는 앞만 바라보도록 정신을 흐려 놓고 우릴 좀먹던 핑크색 괴물의 체는 대체 뭐였어? 우리가 믿었던 건 고작 그따위 무기력하고 비가시적인 환영이었을까.     


아무것도 모른다던 네가 모든 걸 다 아는 눈빛으로 네 살결에 덕지덕지 붙은 내 목숨들을 잘라낼 때면. 이따금 지친 육체 바깥으로 가공가소의 살기가 천상의 성에처럼 돋아났어.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 네가 너 같은 사람을 만나서 나만큼 아파봤으면 좋겠다고. 나는 네 행복을 빌어줄 성숙한 인간은 아니었나 봐. 아름다운 이별 같은 게 있다고 되씹는 사람들에게 조약돌이라도 주워 으름장을 놓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래서 나는. 그냥, 지겨운 껌이라도 되어서 네 외딴섬 같은 삶에 끝끝내 들러붙어 있고 싶었나 보다.       


내 사랑은 늘 아슬아슬했어. 잘린 외줄 위를, 끔찍한 결말을 알면서도 타고 오르는 광대 같았지. 누군가 왔다가도 나를 금세 떠나갔어. 문제를 스스로에게 돌리는 것만큼 추악한 현실이 없었어. 아직도 너는 오해하고 있을 테지.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나는 우리의 끝이 평범할 바에야 그저 혼곤한 선잠처럼 흐리멍덩하고 엷은 가루가 되길 바랐던 거야. 눈에 띄지도, 영영 사라지지도 않으며 어딘가에 반드시 머물고 있을 그것처럼. 감정의 화마에 길들여지는 건 전부 부질없는 신기루일 뿐이었음을. 사랑하기에 우리는 서로를 너무 몰랐지. 털끝만큼도 모르면서 영원이라는 단어를 들먹이고 무언가를 증명해내려 했었지.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너에게 새 날개를 붙여줄게. 지긋한 반복은 그만두고 변색된 다른 울타리를 찾아가. 그때의 너와 나는 어디에도 없거든. 네가 고초와도 같은 먼 길을 쓸데없이 뛰어 넘어도, 결국 나는 그곳에 부재한다는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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