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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Feb 27. 2023

바래다

변하는 것 또한 그렇게 될 운명이었을 테니.

그리 넓지 않은 방의 공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한 뼘 정도 되는 베란다에 옷걸이용 행거를 설치해 두었다. 하도 옷들을 켜켜이 쌓아둬서인지 금방이라도 속에 걸린 것들을 토해낼 듯 위태로워 보였다. 하나, 당장이라도 무너진다면 태산 같은 옷가지를 곱게 뉘일 곳이 없었기에. 옷을 꺼낼 때마다 최대한의 심혈을 기울여 최소한의 작은 손길로 그를 다루었다. 그날도 그랬다. 제멋대로인 듯 보이는 나름의 규칙성 안에서 정갈하게 걸려있는 옷들 중 오늘의 반려자를 곱씹었다. 내가 찾는 그이는 두꺼운 외투 부류였다.     


찬찬히 옷의 결을 살피는데 이상하리만치 조악한 외투가 하나 걸려 있었다. 곧 바스러질 노란 낙엽 빛깔을 띠고서. 문득 호기심을 체득한 나는 겉으로  한쪽을 내민 그것을 들춰보았다. 과감한 손놀림으로 쑤욱 빼내자 나머지의 익숙한 형태가 내 눈을 돌연 사로잡았다. 옷을 꺼냈을 뿐인데 함께 뒤섞여있던 추억이 사정없이 딸려져 나왔다. 몇 해 전, 친한 관계였던 지인과 내친김에 맞추었던 외투였다. 팔 한쪽의 색이 변색되어 옅은 틈이 나있는 외딴 반구에서만 짙은 가을빛을 뿜고 있는 느낌이었다.     


제 것의 빛을 잃을 정도로 나는 그 옷을 꺼내지 않은지 꽤 되었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지인과 불꽃을 피워내던 푸르른 서사를 뒤로 하고 끝내 유쾌하지 못한 마무리로 다음을 기약하지 않게 되었기에. 흰 눈이 잠잠해지며 늦겨울이 마침표를 찍을 무렵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멀쩡한 옷들 사이로 그의 얼굴을 닮은 듯한 회색 외투만이 고통의 흉터를 품고 있었다. 어떤 이유로 면죄부를 박탈당했는지 모르겠지만, 시선이 그것에 닿아있을 때마다 우리 주변을 떠돌았던 슬픈 언어가 선명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연인과 헤어지고 난 뒤 서로가 주고받았던 사랑의 증표들을 한데 모아 즉시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은 사람대로 두고 물건은 물건대로 나누어 실용성에 맞게 활용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도 존중해야 할 선택이며 방향이다. 그런데, 버리지 않았을 경우가 나의 마음 한 자락을 붙잡고 그에 대해 자꾸만 반추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되팔면 돈이 될 수도 있는 물건의 쓰임새를 한낱 자존심이라는 감정에 발목 잡혀 놓치는 것이 아까워서? 아니면 이제는 내가 아니어야 할 그 사람을 깨끗이 잊는 데에 유효 기간이 필요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아마도, 물건을 꺼낼 때마다 묻어있는 흔적들이 눈앞에서 깡그리 버릴 만큼 끔찍했던 기억까지는 아니었거나, 떠오르는 장마 같은 일들이 심장을 그치게 할 만큼의 최악은 아니었거나. 남은 삶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장면 중 하나로 남겨두었거나. 혹은 쓸데없는 말 조각들을 남겨둘 위치조차 선정해 두지 않았거나. 그 의미가 영영 보잘것없게 되었거나. 그래서 물건 하나로 여생이 망가질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없어도 되는 일들 중 하나로 치부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색이 바랜 외투를 들고 곧장 집 앞의 세탁소로 향했다. 안 될 것을 알지만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끝났다는 것과 옷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으므로. 세탁소 사장님은 예상한 대로 그가 유명을 달리했다말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래에서부터 결과를 간직하고 있던 나는 아무렇지 않은 발걸음을 품에 안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를 며칠 정도 현관문 앞에 걸어두다가 이내 헌 옷 수거함의 초록색 몸체 안으로 깊숙이 털어 넣었다. 길었던 고민에 비해 너무나 쉽게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허탈한 심정이 어느덧 쭈글쭈글한 동그라미가 된 심장을 에워쌌다. 어쩌면 묵은 옷을 냅다 잡아먹는 평행 세계의 괴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은 전두엽을 길바닥에 버리고 온 듯 넋이 나간 사람처럼 지냈던 것 같다.     


그 옷이 멀쩡했다면, 나는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뻔뻔하게 입고 다녔을 것이다. 내 돈으로 구매했으니 응당 창피스러울 일도 아니다. 내가 그것을 시커먼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이유는 입을 수 없기 때문에. 가뜩이나 저들끼리 치고 박는 비좁은 공간에서 남은 것들의 숨통을 틔워주기 위해 눈에 띄지도 않을, 하마터면 영영 몰랐을 솜털만 한 것 하나 가져다 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살아야 할 옷들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했다면 우중충한 기분이 조금 나아졌을까.     


옷이 내 곁에 있어도, 있지 않아도 그와 나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때의 추억을 염치 있게 돌아볼 약간의 핑곗거리가 되어줄 뿐. “바래다”라는 표현을 뜯어보면 볕이나 습기를 받아 색이 변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지만. 외부의 볕이나 내면의 습기를 받아 변한 마음들은, 겨우 값싼 솜이 들어찬 옷가지 한 벌로 정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쉽게 버릴 수도 잊을 수도 없으니까. 과거의 걸음을 되돌려 오해를 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세상에는 적절한 시절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좋았던 감정들은 어쩌면 그 당시였기에 가능했을 드라마였다.     


내가 지금 그리운 것은,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아닐 것이다. 이따금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들을 톺아볼 때면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아련해지는 기운들이 나를 몸서리치게 만들어서. 특정 존재가 부재함의 외로움이어서. 순간의 어떤 사진첩을 딱 한 번만 열어보고 다시 까무룩 잊은 채 살고 싶은 그런 욕심이겠지. 온갖 무서운 감정의 신들이 나를 집어삼키고 나면 그리움으로 헐벗은 껍데기가, 그 잠시의 마디가 꽤나 사랑스럽기에. 나는 자꾸 다 지나간 일들을 현실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하여 일부러 헤집어 놓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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