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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Jul 24. 2023

선택을 선택하는 일

이제 그만 동굴에서 나가고 싶은 사람들.

수많은 선택의 갈래에 우리는 서있다. 그것들은 때로 공격적이고 때로 희망적이며 때로 우리를 집어삼킬 만큼 유혹적이기도 하다. 수락한다고 해서 모두 좋은 결말을 이끌어내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뒤로 유보하거나 미루고 미뤄서라도 피해야 할 선택이 있기 마련이다. 실패할 미래를 알면서도 의견을 밀고 나갈 사람이 존재할까?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대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성공의 가능성, 행복의 또 다른 열쇠 같은 창대한 꿈으로 포문을 열곤 하니까.     


막상 무언가 시도한다고 해도, 일이 잘 풀리는 상황은 고사하고. 힘이 덜 들기만 해도 좋으련만 일련의 과정과 고생들이 커지는 기대에 영 못 미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 길을 걷다가 “도전을 하세요, 시작을 해야 성장도 이룰 수 있습니다.” 라는 공익 광고 포스터 문구라도 마주친다면 어느덧 짜증이 솟구치며 웬 뜬구름 잡는 소린가 싶어 마음이 씁쓸해질 것이다. 하나, 그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과거 0이었던 우리는, 무언가 시작함으로써 1이라는 단계를 넘어서게 되었으니까. 시작이 반이라는 말. 진부하고 답답하거나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주 들어서 이제는 듣고 싶지 않다고 해도. 믿을지어다. 뭐든 시작한다면 노력의 결과는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돌아온다.     


경험에 빗대어보자면, 나는 진로를 정하기까지 꽤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면서도 느낀 건, 이 세상에 도움 되지 않는 시도는 없다는 것. 전혀 다른 직종의 업무를 보다가 중간에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내가 배운 것들은 나를 스스로 떠나는 법이 없었다. 하다못해 내 삶에 좋은 영향으로 작용해 하루에 한 번이라도 미소를 띠게 만들어 주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결국 희망이란 놈도 마음에 병을 떠안는 순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상실에 의한 몇 번의 괴롭힘을 당하고부터였다. 스스로 점점 작아지기만 하고 하루에 몇 십 번씩 아무 이유 없는 의구심이 피어날 무렵이었다.     


자꾸만 쓸모없고 누추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무엇을 해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고, 나를 깎아내리는 행동이 어느덧 굳어져 습관으로 변질되었다. 누가 나에게 응원을 해 주값싼 연민처럼 들리기도 했다. 귓구멍이 따갑고 목구멍이 타오르는 기분. 분명 특정인 한 명의 잘못이 아니었을 텐데 나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었다. 나를 불구덩이까지 몰아낸 사람을 잊지 못해서, 그 핑계로 늘어지는 게으름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왜 나만 힘들어야 하나. 의미 없는 질문을 반복했다. 몇 개의 감사한 선택이 와도 모른 척했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며 마음속 터널로 숨어들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실은 나를 믿지 못하는 거였으면서.     


선택을 고민하고 부족함을 따지는 새에 나를 필요로 했던 일들은 이미 저만치 달아났고, 몰랐던 경쟁자는 수십 배로 늘어나 있었다. 이제 정말로 움직여야 했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핸드폰 진동이나 알림 소리를 켜두지 못했다. 사람에게 연락만 오면 심장이 쿵쾅대고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탓이었다. 과거의 일들로 인해 자라난 트라우마를 키우며 살아가는 일. 그것들은 나도 모르는 새에 몸집을 불려 나갔다. 고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마음을 열어야 하는지. 이것마저도 나의 잘못인 건지. 첫 단추를 풀고 다시 끼우는 방법부터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무엇도 하고 싶지 않은 나약과 무기력은 지금까지도 은은히 삶 속에 기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나에게 하기 싫은 일을 왜 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그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아무리 내쳐도 내 곁에 머무는 일이라면, 하고 싶지는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임에는 분명하니까.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물론 하고 싶고 잘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게 가장 행복한 삶이겠지만, 누구에게나 꽃이 피는 시기가 다르듯이. 저마다의 삶에 기쁨의 계절이 찾아오는 시기 또한 다를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언젠간 꼭 올 거라고 생각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겸허히.     


현재만 살고 말 것이 아니라면 당장 실망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혹시나” 라는 소망을 품고 산다. 그 조그마한 열정이 우리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줄지 아무도 모른다. 무당이 자신의 미래를 점칠 수 없다는 말처럼. 현재의 우리라고 해도 절대 알 수 없다. 나는 안 될 사람이라며 부정적인 미래를 단정 지을 수도 없다. 미래의 일은 오직 미래에 존재할 우리들만 알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에게 늦은 일은 아무것도 없다.      


설령, 내가 생각한 미래가 상상보다 초라할지라도. 그 순간이 된 나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나와 그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 미래의 나는 미래의 나. 한 치 앞도 모르는 삶을 살며 어찌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내가 같을 거라 확신할 수 있을까. 당장의 나태함 혹은 당장의 답답함에 스스로 옥죄지 않고, 우리는 계속해서 선택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선택을 놓치는 것마저도 선택의 일부이다. 누군가 나의 선택을 가로챘다면 그것 또한 나와는 인연이 아닌 일. 그 안에는 작든 크든 성장이 존재할 것이다.     


아쉬워 말고, 지난 일을 뒤돌아보되 후회하지 말고, 후회했다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그렇게 나아가면 된다. 너무 자책할 필요도, 옳은 선택을 하지 못해 실망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경험이라는 건, 그 자체로 성스러운 행위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잊지 않는다. 과거 나를 힘들게 했던 어떤 일들, 아프게 했던 어떤 사람들.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나를 일정 부분 이끌어 주며 키워냈다는 사실을 알기에.      


패배감 또한 멋진 얼마나 멋진 단어인가. 이기는 사람이 있다면 응당 지는 사람도 있다. 지는 사람은 인생에서 지는 것이 아니다. 한낱 단편적인 상황의 실패일 뿐, 훗날의 행보는 그날의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더 큰 사람으로, 인생으로 거듭나게 될 자양분을 얻게 된 셈이다. 경험해서 나쁠 감정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 살면서 한 번도 아프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하여, 다시 일어서는 법을 알고 싶다. 나에게 주어지는 소중한 삶의 선택들을 피하고 싶지 않다.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견뎌낸 혹은 도망친 어느 날의 내가 대견하기도 하다. 남들이 보기에 아니라고 해도 어쩌겠는가. 나는 내가 제일 사랑해야 할 이번생의 사람인 것을. 떠나보낸 일은 훌훌 털어버리고 지금의 선택에 지금의 삶에 지금의 사람에 집중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 나는 계속해서 꿈을 꾼다. 나의 것들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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