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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Oct 16. 2023

사랑의 흔적

얼큰하게 술에 취해 혼곤해진 어린 새벽,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을 여린 얼굴. 서로의 지갑을 앞 다투어 열던 그것을 진심이라 믿었던 때. 은근한 마음과 마음 사이로 흐르는 적막. 타오른 두 뺨. 우리는 손을 잡았습니다. 가진 것들 중 가장 좋은 걸 건네고 싶어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초라한 뒷덜미를 감싸며 이내 머뭇거리고 말았잖아요. 바보 같은 마음을 전부 얻은 나그네의 누추한 골목. 울퉁불퉁 비포장도로의 모습으로 굽이친 곡선의 평행선. 마지막 언저리엔 달빛이 눈뜨고 있을 거라 말해주고 싶었는데.     


걸었습니다.     


해안가를 주욱 따라서 계속 걸었습니다. 걸음을 멈추는 건 아주 자잘한 오해일 뿐이라고 누군가 내게 말했던가요. 시시한 말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걷습니다. 허전한 발 옆엔 또 다른 발, 또 다른 발, 또 다른...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 중에 당신의 흔적은 없었는데, 그게 당연하단 사실이 그리도 설웁고 슬픕디다.

      

행방이 묘연한 길고양이를 나 혼자 보았어요.     


우리가 자주 가던 닭강정 집을 몇 번이나 얼씬거렸는지요. 보이지 않는 희망의 곁을 기웃거리는 일이 퍽 외롭고 쓸쓸하단 걸 당신은 평생 모르겠지요. 길에서 주고받던 튀긴 닭 한 입. 흘리지 좀 말고 먹으라니까, 사장님 휴지 좀 주세요. 달큰한 묘약이 뜨겁게 지분거리는 입술을 닦아내었고. 당신은 아이처럼. 그런 당신을 본 나는. 피어났습니다, 미소인지 추억인지 사랑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를 것들은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곤 제멋대로 흘러갔습니다. 혼잣말은 아무도 듣지 못해 혼잣말로 남았을까요. 나는 오래 아팠고 앞으로도 이러겠지요.      


기억으로 수차례 곱씹어 두려 챙겼던 안줏거리를 집까지 털레털레 들고 걷던 밤이 절반정도 남았습니다. 금세 식기라도 할까 봐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지키려던 건 결국 뭐였는지. 그 기억으로 며칠을 살고 몇 년을 살고, 어쩌면 지금도 그렇겠군요. 그때 그 집이 맛집이었는지, 무슨 조미료로 맛을 낸 양념이었는지, 튀긴 정도는 어땠는지. 버석했는지 눅눅했는지, 입천장이 까질 만큼 열렬히 씹어댔는지, 먹는 둥 마는 둥 입만 대고 당신을 지켜봤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왜 어떤 기억은 선명하고 어떤 기억은 희미한 겁니까.     


당신을 따라 울던 낡은 잿빛 커튼이 떠오릅니다. 암막이 녹슬 정도로 슬펐던 날, 그리고 나. 덩달아 불안해지던 밤. 차오를수록 열악한 사랑을 서로의 손바닥에 아로새기며 품을 내어주곤 했었지요. 어제의 찌든 기름이 흉통을 옥죄는 듯한 압박에 속을 게워내면, 어느새 내가 사라집니다. 모르는 거리를 자꾸 걷습니다. 앞이 보이질 않아요. 주저앉아 새끼 동물처럼 절절 구르는 당신, 환상일까요. 거짓이 만들어 낸 환영이라면.      


꿈에서도 만나지 않기를 바랐어요. 흔적이잖아요. 모든 것들이 당신과 내가 사랑했다는 증거 같아서, 말을 걸어옵니다. 이제 그만 꾸고 싶어요. 흑색 뱀이 잔뜩 그려진 이불 안엔 나도 당신도 없을 겁니다. 내 생각에 밤낮을 잃고 심장이 텅 빈 채로 살아간다는 당신의 말을 믿지 않을 거예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겁니다. 이제 그만, 안녕.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방안을 들쑤시며 마침표가 굴러다니는 걸 보고만 있었습니다. 발목이 시큰거리는 푸른 새벽. 빗방울 소리에 조금 뒤척이다가 나는 여느 때처럼 당신에게 갑니다. 흔적이라도 되어야지요. 우리가 될 수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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