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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Oct 23. 2023

영화처럼

영화가 아니었던 모든 영화들.

무성의 색을 뿜는 영사기. 외곽 안에서 천장에 칭칭 동여맨 밧줄에 목을 매달아 생을 끊어내던 사람을 본 뒤로, 옷걸이에 걸린 셔츠에 시선이 닿는 순간마다 그때의 그것 같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날씨가 제법 시릴 만큼 창백해진, 시월 중순 무렵. 계절이 보내는 신호를 저항하며 팔을 훤히 드러낸 옷을 걸친 이들을 보고 누군가는 혀를 끌끌 차더라니. 마치 팔이 떨어져 나간 사람을 마주하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영화처럼. 현실 밖과 현실 안의 괴리에 선 인간의 본능은 멀쩡히 살아있는 팔을, 아니 사지를 잘라내기도 하더라.     


한강에 갔다.     


추위를 적실 강가가 그곳밖에 없어서, 그곳이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바다 곁에 긴 여정을 머물면 마음의 감기를 안고 살기 십상이라는데. 멀찍이 공허하게 펼쳐진 물결을 바라보니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노을이 서서히 고개를 떨구려는 하늘에는 살구빛 햇살 말고 모두가 무채색이었다. 동그란 얼굴, 그게 사라지면 암흑이 된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엄마의 환한 얼굴에 모든 상업 조명이 기를 뺏기던 것처럼. 세상을 채우는 작고 소중한 얼굴들.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르는.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나.     


강을 물들이는 짙은 주황을 탱글한 오렌지라고 부르기에는 자존심이 굽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하나의 해와 나 자신이 동일화된 듯. 지하 조직의 우애 좋은 파트너가 되어. 네가 나이고 내가 너인 것처럼. 마법 같은 주문이 유사 일출을 불러일으킬까 봐. 나는 내심 쓸모없이 조막만 한 기대를 걸었던가. 해가 저문다, 어디론가 들어간다, 사라진다. 집에 가는 걸까. 그 애도 실은 돌아갈 곳이 있었나. 아니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던가. 길 잃은 언행들이 수차례 거래되는 강의 길목. 주인은 없지만 곁을 나눌 이들은 있는 엷은 돗자리들이 괴괴한 저녁 입김에 펄럭대기만 했다.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싶어서 발길을 돌리던 사람들.


모든 목적은 태초의 마음으로 귀결되곤 했다. 드넓은 윤슬에 그대로 몸을 맡기고 싶은 충동은 꾹 눌러야 한다면서, 때때로 지켜지지 않아서 구조대원들이 출동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살리고 죽이는 일, 같은 사람 다른 사람.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것 또한 무엇도 없을 것 같아 심장이 몹시 답답해지는 새벽녘. 원하는 일은 쉽게 이룰 수 없고, 예기지 못한 불행과 불시에 인사를 나누어야 하는. 고달픈 삶을 자꾸만 곱씹으니 짠맛이 났다. 강의 불순물을 씹는 것과 같을까.     


물이 거뭇해지는 프레임을 뒤로하고, 그 사각 안에서 서로의 슬픔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맨 처음 털어내고 싶어 데리고 갔던 구슬픈 영혼에게는 바람 같은 자유의 향을 충분히 뿌리고 나서.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다.     


손에 쥐어진 소주 한 병은 반도 채 비우지 못했을 것이다. 갈매기를 벗 삼아 오래 그리던 꿈들을 매캐한 잿빛 천장에 새기고 싶었다. 뭐라도 남기고 떠나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아서. 모든 건 영화라는 걸 알기에 애꿎은 시멘트 바닥만 발로 툭툭 찬다. 아프다는 투정이라도 듣고 싶은데 미련한 사람은 우는 법을 배운 적 없고. 나는 그것마저 쓰려서 가슴께를 벅벅 긁어대기만 했다. 외로운 길을 멈추지 않고 걷다 보면 좁은 터널이 하나 나온다는 걸 알게 됐다. 멀리 갈 수 없어 가끔은 사무치게 읽고 싶은 얼굴들이 생긴다.     


지나간 영화를 다시 보고 싶었으나, 제목이 기억나질 않았다. 떠나간 시간을 붙잡기 위해서는 무수한 노력이 필요한 법이지.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서 네가 아닌 다른 것들에 관심을 쏟고 그러다 결국 부질없음을 깨닫곤 뼈저리게 후회하고. 닫힌 결말을 어떻게든 열어서라도 제목을 찾고야 말겠다고. 같은 자리에 당신이, 내가 사랑하던 모든 방랑의 존재들이 그대로 있어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영화처럼, 흘러갔다 되돌아오는 방황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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