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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시스템의 빈자리

유연과 구조 사이, 우리가 놓쳤던 것들

by 물꿈


대부분의 경우 조직 안에서의 문제는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을 들춰보면 언제나 시스템의 빈자리가 있었다. 때로는 이러한 시스템의 부재가 사람 문제로 위장되기도 한다.


비영리조직 안에서 제법 볼 수 있는 풍경은 모든 개별 부서가 열심히 하지만, 그 성과나 결과가 미미하거나 지엽적인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런 문제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예를 들면 회의를 아무리 많이 해도 참여한 이들이 정확한 방향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개별이 다르게 해석해 업무에 적용하면 같은 실수가 반복된다. 결국 프로젝트 참여자 모두 그 결과에 대해서 회피하는 경향이 발생하고 만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회의를 마치고도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하는지' 명확히 정리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때로는 이 문제가 단순히 ‘의사소통 부족’으로 둔갑한다. 이러한 회의의 진짜 문제는 의사결정 방식이 없고, 문서화 기준이 없고, 역할과 책임(R&R)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즉,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일일이 해석해야 하고, 그 해석의 차이가 곧 조직의 편차가 된다.


이렇게 되면 일은 더 이상 ‘조직’의 것이 아닌, ‘개인’의 일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해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가 개인의 역량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A라는 직원이 맡으면 모든 프로젝트가 잘 된다. 그러나 B가 맡으면 방향이 자주 바뀌고 결과가 불안정하다. 이때 조직은 ‘개인의 역량 차이가 난다’고 판단할 수 있겠으나(물론 이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사실은 내부적으로 기준과 프로세스가 없기 때문이다. 성공 기준도 실패의 기준도 없고, 체크리스트도 검토 단계도 없다. 그래서 모든 업무가 개인 역량에 의존하게 된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굴러가고, 그 사람이 떠나면 바로 멈춘다. 이런 조직은 겉보기엔 잘 돌아가는 듯 보이나 내부적으로는 운영 리스크가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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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단체의 초기에는 대부분 조직이 특유의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유연함 덕분에 초창기 사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확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직이 어느 정도 규모가 되면 그러한 유연함은 더 이상 장점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갈등·불평등·과로·방향성 상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부서마다 역할과 직무의 기준이 없는 경우이다. 팀장인데 리더십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팀원이지만 사실상 팀장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직급은 높지만 실제 책임은 낮고, 경력 기준은 있지만 적용은 임의적이게 적용하는 등등. 또 다른 예시로서는 진행 프로젝트에 대해서 기준이 모호한 경우이다. 프로젝트 성과를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지 아무도 제대로 설명 못한다. 때때로 몇 개월 동안 밤새워 만든 프로젝트가 단순히 “수고했어요” 한마디로 끝나고, 어떤 프로젝트는 2주짜리 단기 사업을 하고도 빅마우스 부서장에 의해 ‘올해 최고의 성과’로 포장된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이 없는 조직의 전형적인 피로 누적 방식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누가 무슨 일을 얼마나 책임져야 하는지 모른다. 결국 그 안에서 갈등이 발생하고 그 갈등은 대부분 프로젝트 참여자 간 서로의 ‘뒷담화’로 끝난다. 건강한 조직문화가 흐려진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이러한 많은 것들이 책임의 선이 없고 경계의 문턱이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시스템이 없으면 좋은 사람이 나쁜 구조를 메우는 방식으로 조직이 굴러간다. 조직 안에 좋은 사람, 희생정신이 있는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이가 무너진 일정을 대신 맞추고, 비어 있는 역할을 감당하고, 갈등을 중재하며, 책임을 떠안는다. 그러나 그 희생은 시스템이 구현되지 않는 이상 기한이 없다. 어느 순간 그 좋은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박수받지 못한 채 번아웃되어 조직을 떠나게 된다. 시스템이 없는 조직에서는 좋은 사람일수록 더 지치고, 그만큼 조직은 더 회춘의 기회마저 잃는다.


그래서 시스템이라는 일관성이 필요하다. 규칙이 없으면 사람은 그때그때 조직의 기대를 눈치로 파악해야 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구성원은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맞추는 법’을 먼저 배우게 되고, 조직은 표준화가 아닌 임기응변의 문화가 자리 잡는다. 권한과 책임은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직책은 있지만 권한은 따로 있고, 권한은 있지만 책임은 흐릿하며, 책임은 있지만 평가 기준은 모호하면 안 된다. 이 모호함은 본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유연함’이 결국 조직의 성능과 신뢰를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스템이 필요하다. 감시가 아니라 지속가능성으로서.


특히나 비영리조직에서 시스템을 말하면 종종 ‘통제’로 오해된다. 그러나 내가 보고, 경험하고, 분석한 바로는 시스템은 감시 장치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운영의 최소 단위다. 시스템은 ‘사람을 얽어매는 닻’이 아니라 ‘사람이 지지하고 서 있는 바닥’이다. 평소 유연성이 강한 조직은 아마도 바닥이 튼튼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닥이 없으면 유연성은 낭만이 아니라 위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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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가지 떠오르는 문제는 조직의 여러 이슈가 하나의 시스템이나 방법론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사회적기업은 조직의 사업 형태가 사업현장을 가진 부서와 행정사무를 보는 부서가 따로 나눠져 있다. 문제는 서로가 서로의 운영 방식을 맞추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서로가 어울리지 않는 옷에 몸을 억지로 끼워 맞추다 보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여러 상황적 핑계를 대기 시작한다. 어느 쪽도 만족할 수 없는 툴을 사용하기에 상호 아쉬움만 계속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팀에서 구성한 전략보고서를 통해 서로 다른 속도를 상호 조율하고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양손잡이 조직’을 제안했다.


양손잡이(양면) 조직론(ambidextrous organization)은 조직이 기존의 역량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Exploitation), 동시에 새로운 역량을 탐색하고 실험하는(Exploration) 것을 강조하는 이론으로서, 조직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지속가능한 성과를 달성하는 데 유용하다.


수익성과 목적성을 함께 다루는 사회적기업으로서는 적용하기 매우 적합하며, 동시에 현장부서와 지원부서의 운영방식을 분절하여 사고하는 방식에서도 큰 통찰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관련한 대표 학자로는 Charles A. O'Reilly III(스탠퍼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 Michael L. Tushman(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교수), Julian Birkinshaw(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 등이 있음).


기본적으로 영리기업은 수익 창출이라는 목표를 효율적으로 구성하면 되고, 사회복지기관은 위탁받은 정부나 기업의 예산, 혹은 모금액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는 목표를 구성해 가면 될 것이지만, 사회적기업처럼 미션 확대와 시장 효율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조직에게는 이 두 가치를 ‘절충’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강화’하는 설계가 필요하다. 이는 ‘양쪽을 포기하지 않는 전략’을 구사하여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기회요소를 찾는 지속가능성을 담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직이 커질수록 운영의 방식은 비단 한 방향일 수는 없다. 사회적 가치와 시민성, 재정의 안정성과 성장,
현장의 속도와 전략의 속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직 내 갈등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 문제는 갈등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갈등을 조율하는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다. 양손잡이 조직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화려한 전략이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구조다.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정책을 분리하고, 때로는 각자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형태로 공통 교집합을 함께 연계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 구조가 없으면 양손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만 일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는 결국 두 손 모두 쥔 것 하나 없이 빈 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 장에서 이야기한 핵심은 어쩌면 단순하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 비영리조직은 좋은 사람들의 헌신을 자원으로 삼아 오랫동안 버텨왔다. 그러나 이 방식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좋은 사람을 오래 지키고 조직이 늙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현 상황에 맞는 새로운 제도와 기준, 그리고 새로운 구조가 필요하다. 그 시스템은 사람을 얽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버티고 성장할 수 있게 돕는 기초이자 바닥이다.


조직의 젊음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지지하는 구조에 있다. 사람을 위한 시스템이야말로 조직의 지속가능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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