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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거울 들여다 보기

나와 조직을 자각하는 순간 시작되는 이야기

by 물꿈

어느 순간부터 거울 앞에 서는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바쁘고 여유가 없어서일까 생각했지만, 문득 어쩌면 이미 중년이 된 나를 직시하는 일의 불편한 심리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닿았다.


물론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청년 시절의 감각이 남아 있다. 밤샘을 하고도 버티던 체력이나, 새로운 일에 눈이 반짝이던 그때의 속도와 온도 같은 것들. 몸은 잊었는데 마음은 아직 놓지 못한 시간들이 내 깊숙한 곳곳에 잔존해 있다.


하지만 거울은 이런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말한다. 내가 아무리 나를 예전 청년의 연장선으로 느끼고 싶어도 지금의 나는 분명 중년의 사내다. 실감하건 하지 않건, 그것이 현실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이상하리만큼 씁쓸했다. “나만은 아닐 거야”라고 생각해 온 마음이 결국 허물처럼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요즘 젊은 세대에게 '영포티(Young Forty)'라는 표현이 다소 조롱의 언어가 된 것도 일견 이해가 간다.


그러던 중, 문득 이러한 감정이 내가 근무하고 있는 조직에까지 연결되어 갔다. 어쩌면 내가 보는 내가 실제의 나와 차이가 있는 것처럼, 조직 구성원들이 보는 조직의 모습이 사회에서 바라보는 조직의 모습과 다소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시민사회 안에서 비교적 혁신적이라고 평가받던 한 사회적기업에 몸담고 있다. 나 또한 그 명성과 실험정신에 이끌려 들어온 사람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조직의 구성원 모두는 오래도록 스스로를 '젊고, 혁신적이며, 유연한 조직'이라고 믿어왔다. 과거에 수행했던 반짝이는 일들, 우리만의 자부심과 운동성이 있었고 그것들이 우리를 늘 새롭게 유지시켜 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라는 거울을 통해 냉정히 바라보면 이 조직의 모습은 퍽 다르게 보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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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도 어느 순간 중년이 된다. 눈가 주름처럼 잘 보이지 않는 균열과 말없이 쌓아온 피로가 덧대어져 서서히 변화돼 간다. 내부에서 우리는 '아직 충분히 잘하고 있다'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덜 불안하게 만드는 일종의 주문이 되어 버렸다.


혹시 바깥에서 바라보는 일반 시민들은 조금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을까?


“저 조직… 예전만 못한 것 같아.”


그런 말들은 직접적으로 들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 어딘가에 떠도는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 같았다. 거울 속의 내가 실제보다 더 젊어 보이고 싶어 하듯, 조직도 스스로를 늙었다고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다. 변화가 더디어진 것도, 결정이 흐려지는 것도, 새로운 것을 망설이는 것도 대개 '안정적인 운영'이라는 말로 포장된다.


그때 나는 내가 본 거울을 떠올렸다. 우리 조직은 조금씩 위험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데 속에서는 미세하게 늙어가는 그 마음을. 사람도, 조직도, 늙음은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는다. 조용히, 은밀하게, 말없이 스며든다. 비영리조직의 늙음은 더더욱 그렇다. 단순 정량적인 성과로 증명하지 않는 영역이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늙어가는 속도를 더 늦게 자각할 뿐이다.


왕왕 내부 회의에서 들리던 말들이 있다.


“우리가 잘하는 것을 합시다.”


“이 방식이 우리 고유의 방식이에요.”


이 문장들은 조직을 지켜주는 말 같지만 사실은 조직을 서서히 늙게 만드는 말이기도 하다. 행동하지 않아도 되는 변명,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지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안정적 선택들. 이런 말들이 반복될수록 조직은 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늙어간다.


그래서 나는 조직의 미래를 먼저 꿈꿔보기로 했다. 늙어가는 조직을 저만치에서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 늙음을 더 잘 이해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나는 조직의 현재를 보기 위해 미래에서 거슬러 오는 방식을 택했다. 지금이 아니라 먼 훗날의 조직을 먼저 상상해 보는 것. 그렇게 해서 내가 근무하고 있는 기관의 미래를 위한 전략보고서를 담당해 제작하기 시작했다. 해당 문서는 형식상 ‘중장기 전략 보고서’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아주 개인적인 기록이기도 하였다. 그 안에는 말하지 못했던 균열들, 누적된 회의감,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 함께 들어 있었다.


그 스케치 노트를 다시 펼쳐보며 나는 깨달았다. '오래된 조직은 위험하다'라는 평가는 조직을 비판하는 사람의 문장이 아니라, 조직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품게 되는 질문이라는 것을. 내가 나의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조직의 늙음을 인정하는 일은 ‘나는 이제 중년이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일과 비슷하다. 조금은 씁쓸하지만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그 순간을 지나야 비로소 다시 젊어질 수 있다. 이 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이 시리즈는 조직을 탓하는 글이 아니다. 늙어가는 조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늙음 속에서 다시 젊어질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기록이다. 그리고 그 모든 출발점에는 단 하나의 질문이 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어디쯤 와 있는가?'


나는 그 질문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거울을 다시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작업을

<공익조직의 미래를 묻다>라는 타이틀로 기록하기로 했다. 어쩌면 '거울 바라보기'라는 타이틀이 더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먼저 이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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