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단편소설의 조류 사이에서 활동가가 배워야 할 삶의 자세들
소설(Fiction)은 우리 인류사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오고 있을까요?
이러한 가상의 이야기는 우리를 들뜨게도, 슬프게도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한 ‘있음 직한’ 이야기들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장악하고 있죠.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를 통해 이 세계를 배우고 유형화해 왔습니다. 즉, 픽션을 가까이 둔다는 의미는 우리 가까이 비추어 보는 거울과 미루어 보는 창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문학이 무용한 세상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죠. 우리는 1인칭으로 살며, 단 한 번의 삶을 살아갑니다(설령 윤회가 있더라도 그것은 경험론적 측면에서는 달라지지 않죠). 다시 말해 나의 경험은 결국 나의 세계에 국한합니다.
내가 아는 세계가 모든 것인 줄 알 때, 인간은 편협해집니다. 흔히 알려진 이야기로 미국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가 한 강연에서 ‘문명의 첫 증거가 무엇이냐’라는 어느 청중의 질문에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넓적다리뼈’라고 답했다죠. 인류의 문명은 그러한 타인의 고통(과 기쁨)을 공감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인간다움’도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야 타당합니다.
많은 문학 비평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나 친구, 또는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 속에 있는 타자성을 일깨워 준다고요. 상상에 의한 허구의 문학인 순문학의 핵심은 바로 타자성이며, 그러한 이유로 우리의 고독을 경감시켜 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자신과 사람들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랑과 우정이 너무나 취약하고, 위축되거나 사라지기 쉬우며, 공간과 시간과 불완전한 연민, 그리고 가정과 애정 생활의 온갖 슬픔으로 짓눌리기 쉽기 때문입니다(소설은 그 상처를 대신 겪어주니까요. 그리고 심지어 그것을 언어로 붙잡아 두기까지 하니까요).
이러한 기능을 하는 픽션 중, 특히 오늘은 단편소설(Short Story) 중심의 두 조류에 대해 알아보고, 단편소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삶의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왜 단편소설이냐고?
아일랜드 작가 프랭크 오코너는 단편소설이 소외된 개인들, 특히 사회 주변부에 있는 개인들을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장르라고 찬양하였습니다. 관련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위 집단(Submerged Population)의 발견 : 오코너는 단편소설이 사회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사람들, 즉 '사회적 하부 구조에 침전된 집단'을 다루기에 가장 적합한 양식이라고 보았습니다.
2. 사회적 귀속감 : 오코너는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를 '사회적 안정성'에서 찾았습니다. 장편소설은 독자가 작품 속 사회를 현실의 연장선으로 느끼게 하며, 인물이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단편소설은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순간, 즉 '개인적 고립'의 찰나를 포착합니다. 오코너에 따르면 단편소설 속에는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사회'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홀로 선 개인의 '외로운 목소리'만 존재합니다.
3. 강렬함과 응축(인생의 한 단면):
단편소설은 인생 전체를 조망하기보다 특정한 ‘결정적 순간(Epiphany)’을 다룹니다. 사회 주변부의 인물들은 거창한 일대기를 갖기 어렵습니다. 대신 그들이 겪는 찰나의 좌절이나 깨달음은 짧은 분량 안에서 훨씬 더 강렬하게 폭발합니다. 오코너는 단편소설이 지닌 이 '시간적 제한성'이 오히려 소외된 자들의 불안정한 삶을 표현하는 데 (아마도 미학적 기준에서) 최적의 도구라고 믿었습니다.
다시 ‘공감’의 영역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비영리활동의 근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비영리활동의 기본적인 태도는 바로 ‘공감’이며, 그 공감의 상당 부분은 사회적 약자-하위 집단(자신을 포함한)의 연민에 기대고 있습니다. 공감해야 진정성을 가지고 현장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현장의 부조리를 인식하고(개입) 바꾸고 싶은 현실이 있어야(지향) 미래는 다가옵니다. 하여 모든 활동가는 기본적으로 ‘꿈꾸는 자(dreamer)’에 가깝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미 직업 자체에 낭만성(아니면 전복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혁명은 최고의 낭만이라고들 하죠)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잘 공감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을 학습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자신의 세계를 벗어던지고 타인의 세계와 개별의 삶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 이해의 진정성을 위해서는 타자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그 개별 삶의 ‘구조’와 ‘서사’ 모두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1인칭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러한 타자를 경험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작가의 전지적 영역이 녹아져 있는, 세계 안에 갇힌 문제적 인물을 다룬 ‘픽션’이 다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작은 실마리가 됩니다.
‘서사(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와 ‘구조(그 일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는 픽션이 다루고 있는 매우 중요한 세계관입니다. 그 세계관의 이해를 위해 그 서사와 구조를 다루는 영역의 양극단 지점에 있는 두 작가를 소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의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서구 문학의 정전을 논하며 현대소설의 거대한 두 줄기를 체홉과 헤밍웨이, 그리고 카프카와 보르헤스로 압축하곤 했습니다. 블룸이 이 구분을 유용하다고 본 이유는, 20세기 이후 단편소설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문학적 욕망’을 향해 진화했기 때문입니다.
단편소설은 ‘세계 인식의 형식’이기에 세계가 인간에게 어떻게 주어지는가를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돼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보다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를 더 중요하다 보았습니다.
그 세계를 비교 확인하기 전에 개별 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체홉-헤밍웨이 작품의 특징 : 블룸은 이 흐름이 영미 단편의 주류 전통이 되었다고 보았음.
1. 체홉-헤밍웨이 전통: 사실주의와 서정적 절제, 삶의 미세한 진동을 붙잡으려는 욕망
: 단편소설의 새로운 가능성
큰 사건이 없어도 된다
결말이 닫히지 않아도 된다
인물의 삶이 “그대로 계속될 것 같은 상태”로 끝나도 된다
=> 단편은 하나의 ‘이야기(서사)’가 아니라 삶의 단면, 감정의 기압, 관계의 미묘한 균열을 포착하는 형식.
: 연관 특징
사실주의적
인물 중심적
여백과 침묵이 많고
독자가 “아무 일도 없었는데 뭔가 바뀐 것 같다”라고 느낌
카프카-보르헤스 작품의 특징: 블룸은 보르헤스 같은 작가가 단편을 정서의 형식이 아니라 지적 충격의 형식으로 전환하였다고 판단
2. 카프카-보르헤스 전통: 형이상학적 우화와 지적 미로: 단편소설의 새로운 정의
분량의 제한성
아이디어, 개념, 역설의 실험장
순수성의 보존
=>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닌 '재발명(Reinvention)'. 현실을 그대로 복제하기보다, 비현실적인 설정을 통해 현실의 본질을 폭로.
: 연관 특징
이야기보다 개념이 먼저 나오고
인물은 기능적이며
세계는 은유적·알레고리적이며
소설이 철학·수학·신학과 경쟁한다
블룸이 정리한 이 두 가지 전통은 일반 독자가 세상을 해석하는 '두 개의 렌즈'가 되어줍니다.
A. 헤밍웨이의 렌즈: ‘어떻게 살 것인가’ (행동의 윤리)
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면, 삶은 거창한 의미보다 '현재의 성실함'에 집중하게 됩니다.
세상은 가혹하고 허무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맡은 바를 완수하고 품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감각을 줍니다.
독자는 ‘말보다 행동’의 중요성을 배우며, 외부의 시련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자아를 구축하게 됩니다.
B. 카프카의 렌즈: ‘나는 누구인가’ (존재의 심연)
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면, 일상의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낯설고 위협적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시스템(법, 관료제, 가족)이 얼마나 비합리적일 수 있는지 깨닫게 합니다.
독자는 자기 내면의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되며, 타인의 고통이나 소외를 더 깊은 층위에서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얻습니다.
체홉-헤밍웨이의 세계 인식 안에서 세계는 상처 입었지만 여전히 ‘살아낼 수 있는 장소’이며 인간은 태도를 통해 의미를 지킬 수 있습니다. 동시에 카프카-보르헤스의 세계 인식 안에서 세계는 처음부터 이해 불가능하고, 권력과 규칙은 익명적이며, 인간의 태도조차 무력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세계는 과연 합일될 수 있을까요?
전 그렇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미 우리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의 기조와 상관없이 우리는 늘 그러한 두 기둥 사이를 거닐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부조리를 알면서도 오늘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불합리 속에서도 매일 출근하고, 친구를 만나고, 아이를 키우는 등, 그러한 세계 속에 짓눌리거나 완전히 무력해지지 않기 위해 작은 태도와 감정을 다잡아가죠. 그렇게 우리는 매일 용기 있게 개인의 서사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 두 세계의 조화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구현되고 있습니다. 문학적으로 이뤄내기 그 어려운 작업을 우리는 매일매일 실제화하고 있는 ‘대작가’들입니다. 다만 그것이 글로 표현되지 않았을 뿐… 각자는 나름의 위대한 서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위대한 영웅이 아닌, 우리와 같은 평범한 개인도 ‘위대한 서사’를 쓸 수 있습니다. 혼돈 속에서 질문을 던지고, 허무 속에서 의미를 찾으며 걸어가는 그 과정 속에서, 그것이 개인 서사의 개요가 될 것입니다.
문학은 인간만을 위한 장르입니다. 신을 다루는 경전도 결국은 인간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결국 구원은 신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언어, 즉 사유 구조 안에서 기인합니다. 인간은 인간을 구원해야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구원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활동가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그 구원에 대한 답을 찾고자 우리는 문학을(특히 소설을) 가까이합니다. 나와 이 세계의 구원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를 구원할 때 비로소 세계가 구원되고, 세상을 구원할 때 비로소 내가 구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주체성이 타인의 얼굴 앞에 서서 그들의 고통에 무한히 응답해야 한다’는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윤리적 책임론과 세계를 활용의 대상인 '그것'이 아니라 인격적 현존인 '너'로 마주할 때 비로소 진정한 실존이 개화한다는 오스트리아의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관계 철학 안에서도 그 인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소설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타자의 삶을 나의 내면으로 초대하는 행위가 고립된 개별자로서의 자기를 극복하고 타인과 세계를 향한 응답적 관계를 회복하게 함으로써, 나를 구원하는 것이 곧 타자를 향한 책임을 다하는 길이며, 타자를 구원하는 노력이 곧 나의 존재적 완성에 도달하는 유일한 통로라는 자아와 세계의 일체적 구원 서사를 완성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방법론을 문학을 통해서, 체홉, 헤밍웨이와 카프카, 보르헤스를 통해 그 힌트를 찾아보면 어떨까요? 우리 모두 활동가로서(나 개인으로서나) 자신만의 시선과 주관을 가지고,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부조리에 함몰되지도, 인간적 영웅주의에도 빠지지 말고… 자신만의 시선(카프카)과 내러티브(헤밍웨이)로, 스스로를 구원해 보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그것 안에 ‘인류의 빛(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활동가의 가능성은 물론이고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인간의 정서를 읽으려면 인간적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해럴드 블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