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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꿈 Aug 27. 2020

보이지 않는 악과 싸우는 법

집단화된 사회 속에서 요구되는 개인의 윤리성

공공선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개인일까 혹은 집단일까? 이상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회적·철학적 담론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몇몇 학자들은 개개인들이 선을 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과 제도를 중심으로 공공선의 구성을 꾀하는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이상의 시각은 우리를 조금 불편하게끔 한다. 흡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에 대한 고유성과 자발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맹자가 말한 ‘내재된 선(측은지심)’에 대한 인식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는 규율로 상황을 조절하는 방식이란 독재사회나 감시사회와 같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사회적이고도 집단적 존재인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 혹은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익히 알려진 애쉬의 동조실험 등 몇몇 군중심리 및 대중심리 실험의 결과물들은 인간의 판단이 독자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를 기준으로 선의 발현을 고려한다면 자신의 선한 행위가 지속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가 조성되거나 혹은 자신의 섣부른 생각과 행위가 해당 공동체 안에서 비난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의식적으로 개인의 선함은 드러날 것이다. 이상은 법과 규율보다는 다소 완화된 문화적 접근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적 측면이 희석된 후 개별의 ‘보이지 않는’ 영역이 조망될 때 선은 기존과 동일한 방식으로 발동될까? 이상의 질문을 하게 된 것은 최근(현지 시간 20일) AFP 통신을 통해 알려진 벨기에서 일어난 한 사망사건 때문이다.


지난 2018년 2월 벨기에 샤를루아 공항에서 슬로바키아 남성 요제프 호바네츠가 항공권을 제시하지 않아 탑승을 거부당한 뒤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그에 대한 항의로 호바네츠가 유치장 안에서 피가 날 정도로 자신을 자해하자 벨기에 경찰 6명이 그를 포박하고 담요를 얼굴까지 감싸 약 16분간 그를 짓눌렀다. 이후 의식을 잃은 그는 응급치료사가 급하게 심폐소생술을 했음에도 결국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었다. 호바네츠의 죽음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문을 품은 유족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2년 여가 지난 후 폐쇄회로(CCTV) 영상이 공개되자 이처럼 논란이 커진 것이다. 어찌 보면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동일하게 경찰의 과잉진압이 문제시된 사건으로 비추어질 수 있겠지만, 이 사건이 더욱 충격적인 이유는 바로 벨기에 경찰과 의료진의 태도 때문이다. 경찰은 호바네츠를 제압하는 과정 중 시종일관 웃으며 나치 경례 포즈를 취하기도 했고, 응급치료사들 또한 웃음과 담소가 끊이지 않았다.


CCTV라는 폐쇄적 기호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선이 다시금 구조가 아닌 개인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가해자들의 미소에, 특히 심폐소생술을 하며 짓는 구조대원의 미소에 스며있는 층위적인 선과 악의 구조에 경악했다. 자신의 직업적인 역할과 행위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내면의 인식이 복합적으로 엉켜있던 바로 그 유치장은 단순한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개인의 은밀한 이면과도 다름없는 심리적인 공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개인의 윤리성을 먼저 강조하지 않는 상황이론이나 법이론은 이와 같은 표리 부동한 인간상을 만들어내는데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새삼 되묻게 된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저자 스티븐 핑커나 <팩트풀니스>의 저자 한스 로슬링은 동일한 목소리로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통계적으로 우리의 국내외적 상황은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에 벨기에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사건들을 통해 품게 되는 의심은 혹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혹은 눈치채지 못한 악(폭력)의 구조와 층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통계와 수치에는 도무지 잡힐 수 없는 아주 미세하고 미묘한...


그렇다면 우리는 다양한 이름과 모양으로 겹겹이 쌓인 악과 투쟁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상황과 사건을 좀 더 복합적으로, 그리고 미시적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싸움의 출발은 개인의 내면 속에 품고 있는 윤리성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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