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복을 입은 정치인의 등장을 기대하며
정치의 기능은 무엇일까? 많은 이야기가 오갈 수 있겠으나, 정치란 우리네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하지만 2020년의 절반 이상이 지나가는 현시점에서 돌아보았을 때 과연 한국 정치가 얼마만큼 그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지 새삼 질문하게 된다.
유례가 없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국가 내 정치의 역할과 책임을 막중하게 만들었다. 의료적으로는 물론이고 가계와 기업의 활동 제약으로 인해 자칫하면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연쇄적인 사회·경제적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 정치의 역할은 보다 시의성에 맞는 정책적 실행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몇몇 정치인들의 구태의연한 수사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세상은 이미 저만치 흘러가는데 그들만 외따로 과거의 세상에 머물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비단 정치 영역뿐일까. 굳이 변화가 필요 없거나 혹은 변화가 돼서는 안 되는 집단에게 여전히 구세계의 작동 원칙은 매력적이다. 시장이라면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퇴출되겠지만 시대착오적 집단이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이 사회가 떠 앉아야만 한다.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를 앞에 두고 인적사항 확인한다며 페이퍼 차트만 뒤지고 있는 의사를 보면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위중한 재난 상황 속에서 논의되는 사안들을 미루어볼 때 여전히 정치를 일종의 '기술'로 이해하고 있는 정치인들이 많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기술은 대중 여론을 힘입고 대의와 명분을 중심으로 도의적·윤리적 우월성을 드러냄으로써 발생한다. 이러한 정치기술의 치명적 문제는 상황을 수사로만 타개하려 하기에 실제적 변화를 위한 행동은 취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그들이 '때'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사회는 그만큼 분열될 뿐이다.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되묻고 싶다. 과연 현실세계에서 이데올로기가 작동을 하는가? 이웃이 간첩이 아닐까 전전긍긍하는 이들이 과연 우리 주변에 몇이나 있을까? 이데올로기는 다만 기술로서 정치세계에만 존재하고 있다.
정치는 현실세계를 다뤄야 한다. 과거의 정치가 민주화와도 같은 거대 담론들을 담아내기 급급했다면, 현대의 정치는 실생활의 세계를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수용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한 데이터와 그것을 기반으로 한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감 있는 행정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이것은 한 정치인 개인의 당위성이나 도덕적 가치관과는 선을 긋는다. 다른 어느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지금' 필요하다는 현실일 뿐이다. 그간 한국 정치는 서사를 강조해 왔다. 해서 매력적인 스토리가 있는 매력적인 개인을 '판'에 요구해 왔고, 많은 이들은 그것에 이끌려 투표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맞닿고 있는 이 새로운 세계에는 과거와는 사뭇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 저 높은 곳에 홀로 고매하고 당당한 인물은 현재의 우리와는 크게 상관없는 다른 세계의 존재임을 드러낼 뿐이다. 새로운 세계의 정치인들에게는 양복보다는 운동복이 더 잘 어울릴 것이라는 예견 또한 바로 그 때문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