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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꿈 Aug 18. 2020

‘나눔’의 재해석


청소년들이 가장 행복한 순간     

               

여러 기관과 학교에서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는 내게 막 사춘기 자녀를 둔 지인들은 종종 ‘요즘 청소년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곤 한다. 가까운 부모도 도통 모를진대, 나라고 알 수 있을까?        

       

다만 청소년들이 최근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수업에 들어가면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가장 흔하고 일반적인 답은 바로! ‘잘 때’다. 아마 확률로만 따지자면 약 70∼80퍼센트 정도로, 학년이 높아질수록 이 답이 많아진다.         

      

생각해보면 무척 씁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방과 후에도 학원과 과외, (강제적인) 자율학습을 소화해야만 하는 청소년들에게 어쩌면 자연스럽고도 절실한 대답일 것이다. 그런 학생들 앞에서 나눔에 대한 이야기를 두어 시간 내내 떠들어 댄다는 것이 가끔은 미안해질 때도 있다. 쉬는 시간에 곤히 자는 학생들을 도저히 깨울 수 없어 수업 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재운 적도 있다.      

         

학생들이 수업 틈틈이 자고 싶어 하는 이유도 일면 이해가 간다. 내가 진행하는 나눔 교육은 대부분 담당교사가 직접 신청하기에 학생들은 사전 정보가 거의 없다. 심지어 무슨 수업을 하는지도 모른 채 교실에 앉아 있는 경우도 더러 있다. 어쩐지 일반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 같고, 시험에는 안 나올 것 같고, 앞에 서 있는 강사는 호락호락해 보이니 학생들도 방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느슨함 속에서 보다 솔직한 대답이나 반응이 문득 툭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다.        


“나눔은 사치 아닌가요?”        

            

또 하나, 수업 시간에 매번 학생들에게 묻는 것이 “나눔이란 무엇인지, 나눔을 왜 해야 하는지”다. 대체로는 “나누면 행복해서요, 어려운 이웃이 있으니까요,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요” 같은 다소 빤한 대답들이다. 그런데 하루는, 중학교 수업에서 한 남학생이 나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나눔은 사치 아닌가요?”        

       

학생은 다소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시쳇말로 ‘흙수저’인 자신에게 나눌 것이 무엇이 있냐며 잘 사는 동네의 학교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학생이 내용에 관심이 없거나, 장난을 치고 싶어 그런가 했는데 끝까지 들어보니 그 또한 옳은 말 같다. 나눔이란 표현 안에는 주로 ‘양적 분할’의 개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나눔을 ‘하나를 둘 이상으로 가르다’, ‘여러 가지가 섞인 것을 구분하여 분류하다’로 정의되어 있다. 이 분할적 의미로만 보자면 주로 ‘물질을 제공하는 행위’로서의 나눔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소유한 물건을 상실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행동은 아이들에게 자칫 ‘빼앗고 빼앗김’의 의미로 곡해될 여지가 있다. 또한 ‘양적 분할’이 ‘자기희생’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작용하면 일반적으로 나눔에 참여하는 일도 어려워질 수 있다. 나눔의 의미를 빌 게이츠처럼 크게 성공한 이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거나 마더 테레사와 같은 이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 중에 자신의 나눔 계획을 적는 활동을 하다 보면 많은 학생들이 ‘나중에 부자가 되거나 유명해진 다음에 나눔을 적극적으로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평소 우리가 이웃과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는 것처럼 나눔은 보다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일인데도 말이다.               


나눔의 또 다른 의미로는 감정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는 자선 행위Charity가 있다. 빈곤층에 대한 자선과 긴급 필요에 대한 지원을 의미한다. 이 의미를 좀 더 확장한 개념으로 필란트로피(박애 Philanthropy)가 있는데, 그리스어 ‘필로스(사랑 philos)와 안트로포스(인간 anthropos)가 결합된 어원에서 알 수 있듯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함’이라고 해석된다. 앞서 설명한 자선 행위와는 구별될 수 있는 것이, 박애로서의 나눔은 단순히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을 넘어 사회 자체를 변화시키기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그런데도 필란트로피는 실제적 의미보다 민간의 기부 활동, 혹은 그 의의를 뜻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될 때가 더 많다. 유럽에서는 주로 박애의 개념보다 자선의 형태로 지칭되고 있어 더욱 그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               


이렇게 나눔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면, “나눔은 사치”라고 말하던 학생의 주장이 일면 타당하게도 보인다. 이성적인 판단에 따른 선택이라 하더라도, 결국 나눔은 다른 한쪽의 총합이 줄어드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점을 벗어날 수 없다. 이미 가지고 있는 ‘내’가 전제되어야 하고, 그런 나의 감정적 의지가 발현되어야 하고, 나보다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한 대상이 존재해야만 나눔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러 복지기관에서 수혜 대상의 어려운 면을 부각하며 모금을 독려하는 광고를 보면 불편해질 때가 있다. 최근에는 ‘빈곤 포르노’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개인의 비극과 빈곤을 부각해 광고 효과를 극대화하는 사진이나 영상들을 무방비로 노출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도 적잖다. 물론 해당 방식의 모금 또한 누군가에는 유의미한 나눔의 방식이다. 그러나 문제의 구조적 원인에는 접근하지 못하는 점이나 상대가 일방적으로 수혜를 받는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운 것 또한 사실이다.  


                             

공유로서의 나눔         

           

좀 더 동등한 위치에서, 수평적 관계로서의 ‘나눔’을 재정의할 수는 없을까? 이러한 고민 속에서 대안적으로 생각해낸 것이 공유(sharing) 개념으로서의 나눔이다. 공유는 각자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과 서로 나누는 것,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 폐쇄되어 있는 자원을 개방함으로써 그 가치와 효율을 높이는 방식이다. 집단 지성, 혹은 지식의 공유처럼 ‘공유로서의 나눔’은 무한성을 함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학생들과 나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지식이 고갈되어 다시 도서관에 틀어박힐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나의 지식과 정보는 더 확장되고 두터워질 것이다.           

    

더불어 최근 활성화되고 있는 공유경제의 영역도 그러한 측면에 닿아 있다. 값은 비싸지만 활용도는 높지 않은 공구를 지역 내의 다양한 사람들과 공유하는 공구 도서관이나, 여유 공간을 타인과 공유하는 셰어 하우스나 여행자 숙박 시스템, 자신이 필요할 때만 효율적으로 차량을 이용하는 카 셰어링은 자원을 제한적으로 소유할 때보다 많은 대상과 공유함으로써 그 본연의 가치를 더욱 극대화시킨다는 강점이 있다. 단순히 비용의 문제를 넘어 환경과 가치관 문제까지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유의미하다.        

       

그렇다면 나눔으로 인해 나의 몫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총합과 상대의 총합이 동일해지도록 전이되고,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전달이 아닌 수평적 전달을 지향하며 불균형 상태에 놓인 현상, 자원, 행위들에 대해 분석하고 공존하기 위한 관계성을 기르는 것, 그 일련의 과정을 ‘나눔’이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나눔은 물리적인 비용과 시간의 제약을 넘어 나에게 주어진 자원이나 소비 안에서도 충분히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필요 없는 물건이 있을 때 쉽게 버리기보다는 재활용 자선 가게를 찾아 기증하는 것, 유명한 프랜차이즈 커피를 찾기보다는 생산자들의 자립을 위해 공정무역 커피를 소비하는 것, 대기업 제품보다 공생의 가치를 내세우는 생협 제품이나 공익상품을 구매해주는 것, 더 쉽게는 가까운 거리는 가급적 걸어 다니고 생활 쓰레기를 줄여가는 것, 내가 가진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기꺼이 시간을 나눠주는 것 또한 넓은 의미에서 나눔의 영역에 속할 수 있다.                   

           


공존을 위한 균형      

              

공존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나눔은 양쪽의 대상을 홀로 두지 않는다. 나눔은 ‘너’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 인(人) 자가 서로 기대어 완성되는 것처럼 네가 없이는 나도 존재할 수 없다는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이어진 실천과 공감의 영역이다.      

         

그렇게 바라보자면 ‘나눔은 사치’라고 말하던 그 학생과는 또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살면서 다른 이들과 지식이나 감정을 ‘나눌’ 때는 개인의 빈곤과 결핍을 부각하지 않는다. 나눔이 온건한 형태로 전해질뿐만 아니라 그 관계를 통해 오히려 더 풍성해지고 두터워진다. 나눔교육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나눔’은 분리를 넘어 이런 관계성과 공감의 영역이다. 최근 캐나다 퀘벡의 의사들이 자신들의 급여 인상에 반대하는 대규모 청원을 진행한 적이 있다. 간호사와 병원 행정·사무직원들이 열악한 근무환경에 직면해 있고, 이로 인해 환자들이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사들만의 임금인상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오히려 전체적인 의료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고 전우익 선생이 우리에게 되묻는 것처럼 ‘함께’라는 자각, 공존의 관계인식이야 말로 나눔의 핵심일 것이다. 진정한 나눔은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누려’ 하지 않을 때 개인은 서로 얽혀 있는 그물코 같은 관계망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나눔은 사치가 아니라 공존의 소박한 양태이며, 오히려 나누지 못하는 것이 ‘자존의 독단적 사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나눔교육 수업 중에 ‘가치 장터’라는 일상적 나눔을 학생들끼리 연습해보는 시간이 있다. 학생들은 자리에 일어나 웃고 떠들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 정보를 나누며, 감정을 나눈다. 돈도 시간도 부족한 처지지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나눔의 영역을 기어코 생각을 해낸다. 반 친구들과 샤프심을 나누겠다며 즉석에서 샤프심 한 통을 기증한 학생도 있고, 급식을 먹을 때 배고픈 친구에게 순서를 양보해주겠다는 학생도 있고, 그 소중한! 온라인 게임 아이템을 친구들에게 나누겠다고 선언해 엄청난 환호를 받은 친구들도 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뤄지지는 다양한 나눔 속에서,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무척 즐거워 보인다는 것이 공통적인 모습이다.        

       

“나눔이 사치 아니냐고” 내게 질문을 던졌던 학생이 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어 살펴보니 이미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어깨를 주무르며 ‘시간의 나눔’을 열성적으로 수행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불과 몇 분 전의 그 심드렁한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친구에게 어떤 말로 답변을 해야 할까 고민하며 인상이 굳어 있는 사이, 그 학생은 스스로 답을 찾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나눔은 나누는 사람의 몫을 줄어들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눔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공존하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참고문헌

《유아들의 나눔의 특성과 의미에 관한 연구》, 유아교육연구 제32권 제1호, 송선화, 2012     

《시민성 함양을 위한 고등학교 청소년의 나눔교육》,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강현주, 2009     

『이타주의자의 시대-유럽 필란트로피의 뿌리와 현대적 재발견』, 테오 슈이츠 , 경향신문, 2017     

『되살린 미래』, 아름다운가게, 이승은, 싱킹가든, 2013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전우익, 현암사, 2011              


       



(해당 글은 격월간 대안교육 잡지 '민들레' 2018년 4월 호에 수록된 기고문 임을 밝힙니다. 약간의 내용 수정 과정을 거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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