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초가을 / 책 읽고 살찌기 좋은 계절
그림 작가 온수와 교육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물꿈이 함께하는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입니다.
'엄마'와 '아빠'라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친구가 만나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나눕니다. 멀고 깊은 이야기도, 가깝고 가벼운 이야기도 담습니다.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는 매월 첫째 주, 셋째 주 토요일에 공유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누이들과의 터울이 적잖았고 낯가림 때문에 친구를 폭넓게 사귀지 못했기에 자연스럽게 집 안에서 혼자 노는 일이 많았다. 부모가 된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내 성향에 어머니 아버지도 꽤 걱정하셨을 것 같(지만 티는 안 내셨)다.
그때만 해도 요즘에 비해 상대적으로 놀잇감이 흔치 않을 때라 대부분의 동네 아이들은 골목과 놀이터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림책의 일러스트를 잘라 요구르트병이나 우유갑에 붙여 직접 장난감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해당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심심하거나 지루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수많은 수제 장난감이 늘어져 있던 바로 이곳이야말로 완벽한 '내 세상'이었다.
어린 시절 또 다른 내 세상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던 경험은 바로 다락방에서 책을 읽던 순간이었다. 당시 집 안방에는 짧은 나무 층계로 연결된 다락방이 있었는데, 나는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할 때면 종종 그곳에 올라 혼자 놀았다. 한 줄기 빛을 통에 눈에 들어오는 부유 먼지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쿰쿰하고도 시큼한 냄새. 흡사 그 안에는 보물이라도 숨겨있을 것 같았지만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널브러져 있는 오래되고 빛바랜 위인전들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에 올라 꾸준히 그리고 조금씩 그것들을 읽어나갔던 기억이 있다. 그곳은 또 다른 의미로 완벽한 '내 세상'이었다.
별로 긍정적이진 않은 것 같지만 그때의 기질이 변함없이 이어져 나는 지금도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방 안에서 홀로 나만의 놀이를 즐기거나(그렇다. 지금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쓰는 것도 나에겐 그 시절과 동일한 일종의 놀이다) 스탠드 불빛에 의존해 조용히 책을 읽는 행위를 더 좋아한다(그렇다. 나의 근시는 이처럼 예견할 수 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나란 인간은 여전히 유아적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라지는 않았지만 내 아이들도 나의 어린 시절과 꼭 닮아 집 안에 있는 것을 더 즐기며, 그 안에서 자신들만의 놀이를 끊임없이 개발하며 논다. 코로나19 시기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굉장히 미래형 가족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또 아내와 나의 교육 철학이 어린 시절 가장 중요한 학습 영역은 '잘 노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아이들은 정말 하루 종일, 아주 열심히!! 논다.
더불어 아이들은 생일 선물로 장난감보다 책을 요청할 정도로 책을 좋아한다. 또 같은 책을 반복해서 보는 편이라 구매하는 것이 그렇게 아깝지는 않다. 요즘엔 아이 둘 다 한국사에 푹 빠져서 역사 이야기를 자기네들끼리 서로 많이 한다. 역사적 지식에 무지한 나는 이미 대화에 끼기가 힘들다(태정태세문단세...예성.. 그다음에 뭐였지?). 하도 흥미가 많기에 최근에는 아이들에게 프로젝트 수업을 해보자고 요청했다. 그러자 스스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조선의 문신 유성룡을 주제로 삼더니 인터넷 검색이며 만화 <징비록>과 다른 역사책을 뒤져 나름대로 그럴싸한 발표를 해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교수자가 아닌 학습자가 되는 것임을 다시금 깨달으며 나도 징비록을 읽어야...
아이들이 책을 좋아한다는 것이 나에게도 큰 이점이 되는 이유는 '나중에 아이들이 자라서 읽을 책을 모아 둔다'는 핑계로 내 책을 구매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는 것이다. 아내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건만 별 다른 취미가 없는 나를 생각해 측은지심 못 이기는 척 수용해 준다.
그런데 솔직히 내가 산 책을 아이들이 읽으려면 못해도 십여 년 이상은 걸리리라. 그래서 실제로 이 책들은 정작 아이들이 자랐을 때 무용할지도 모르겠다. 지식과 가치는 끊임없이 바뀌니 말이다. 또한 책이라는 매체가 그때까지 지금과 동일한 기능으로 살아남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핑계만은 아닌, 나의 진심이 담겨 있다.
나중에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대화가 줄어드는 시기가 찾아오더라도 이 책들을 통해 지금의 나의 감정을 아이들과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이 책들이 나와 아이들을 연결하는 일종의 매개가 되지 않을까? 내 청소년 시절 아버지가 추천하던 펄 벅의 <대지>를 뒤늦게 읽고 아버지의 감정에 대한 흔적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책이란 일종의 미래에 부치는 편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 아이들이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는 힘이 길러졌으면 좋겠다. 홀로 완벽한 나만의 세상을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형태로 누렸으면 한다.
완벽한 '내 세상'은 자라면서 점점 더 획득하기도, 머물기도 어렵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또 타인을 향한 자리는 나의 공간이 구축되면서 점차 열리는 법이니까. 조금도 조급할 필요가 없다.
- 이 글은 <내 세상>이라는 노래로 마무리하려 한다. 모두 고요히, 홀로 내 세상을 만끽하길 바라며...
'온수'의 다음 이야기는 10월 17일에 공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