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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onsoo Oct 17. 2020

[너를 통해 나를] 연필 그림 전성기

2020.5월과 10월 / 때에 따라 아름답게

그림 작가 온수와 교육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물꿈이 함께하는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입니다.


'엄마'와 '아빠'라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친구가 만나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나눕니다.  멀고 깊은 이야기도, 가깝고 가벼운 이야기도 담습니다.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는 매월 첫째 주, 셋째 주 토요일에 공유됩니다.




“아이가 조금 더 크면 다시 해보려고요.”

      

“나중이 되면 녹이 슬어, 다 때가 있는 거야.”      


재능을 발휘하지 않으면 녹이 슨다는 말에 오래 타지 않아 녹이 슨 내 자전거가 생각났다. 전화를 끊고 주차장으로 내려가 먼지가 까맣게 내려앉은 자전거의 자물쇠를 풀었다. 녹슨 체인, 바람 빠진 바퀴, 거미줄 쳐진 라탄 바구니. 손으로 의자를 탁탁 털고 페달을 세게 밟아 전에 보아둔 자전거 가게로 향했다. 앞 집 감나무에 아주머니 여럿이 모여 감을 따고 있었다. 기다란 감 가위로 감이 열린 가지를 툭 잘라 떨어지는 감을 잡으려 손을 뻗는 아주머니의 표정이 밝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자전거를 다시 타보려고요.”     


“오랫동안 타지 않으셨나 봐요.”     


가게 사장님께서 자전거를 살펴주신다.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고, 구석구석 먼지를 털고, 체인과 브레이크에 기름을 쳤다. 무겁게 움직이던 자전거가 생기를 얻은 듯 힘 있고 가벼워졌다. 감사 인사를 드린 뒤 자전거를 타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차가 다니지 않는 긴 평지에서 힘껏 속도를 내어 달려보았다. 또 나의 자전거 기술 최대 장기인 ‘넘어지지 않고 아주 느리게 타기’도 해보았다. 자전거를 타는 균형감을 익힌 후부터는 그 느낌을 잊을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앞 집 감나무엔 아주머니들은 들어가시고 이번엔 아저씨들이 나와 감을 따고 계셨다. 처음 딴 감은 놓쳐서 땅에 떨어져 깨져버렸지만, 두 번째로 딴 감은 멋지게 잡아내셨다. 아저씨들의 표정도 아이처럼 즐거워 보인다.


‘그래, 때에 따라 아름답게.’     


기타를 아주 조금씩 연습한다. 튜너로 기타 줄을 풀었다 조여 음을 맞춘다. 크로매틱을 한 두 번 쳐서 손을 풀고 연습곡 한 곡을 연주한다. 욕심 껏 진도를 나가지 않는다. 올 한 해의 목표는 이 한 곡을 자연스럽게 치는 것이다. 연초보다 부드러워진 코드 전환에 기분이 좋아진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연습하는 것은 아니다. 방 한구석 자리 잡은 기타가 잊혀짐에 낡지 않고 그의 은은한 빛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좋다. 변함없이 퍼져 나오는 기타 현의 아름다운 소리를 좋아한다.     


짧은 글을 쓴다. 먼 곳을 향하는 글쓰기보다 여기 아이와 나의 생활을 더 잘 기억하고 세심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을 한다. 깊은 몰입보다는 찰랑이는 물가에서 시간의 틈새를 나누어 쓴다. 쓰다가도 멈추어 매일의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그릇을 닦는다. 그리고 자라는 아이와 함께 보이거나, 보이지 않을 소중한 페이지의 일상을 지낸다.     


편하지 않은 밤을 보냈고, 새벽에 눈이 떠져 그림을 그린다. 몽당연필로 새 연필을, 새 연필로 몽당연필을 그린다. 한참을 집중하다 옆을 보니 어느새 아이가 깨어 나를 보고 있다. 그리고 있던 연필을 내려놓았다.      


“엄마, 뭐 하고 있어요?”     


필기구를 정리하며, 서툰 노래를 지어 불러 주었다.     


‘네가 엄마를 보고 있으니, 하던 일을 멈추고 너를 안아줘야지. 네가 잠에서 깨어났으니, 하던 일을 놓고 너를 안아줘야지. 네가 너무 좋으니, 모두 멈추고 너랑 놀아줘야지.’     


사실 아이에게 들려주려고 하는 노래이기보다, 그냥 내가 나에게 하는 다짐 같은 가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가 그동안 “엄마한테도 엄마만의 시간이 필요해.”라고 했던 내 말만 기억할까 봐 간지러워도 마음이 전해지도록 노래했다. 품 안에 폭닥 안긴 아이의 어린 볼이 동그랗게 볼록해지는 것이 보인다.     


“엄마, 연필 그리고 있었어요?”     


금세 말똥 해진 아이는 역시나 호기심 어리게 나의 노트를 바라본다. 긴 연필과 짧은 연필이 그려진 페이지를 보고 중간 길이의 연필도 가져와 그려달라 한다. 계획과는 다르지만 한쪽 옆에 중간 크기의 연필을 그려준다. 조금 후, 같이 그리겠다고 그려진 그림 위로 아이의 선이 휙휙 지나간다. 중간 연필은 다 그리기도 전에 연필깍이로 들어가 모양을 잃어버렸다. 단발의 너털웃음을 짓고 그리기는 미완에 두고 나도 연필깎이 놀이에 동참한다.


창문을 연다. 아침 빛이 들어오고 복닥복닥한 하루가 시작된다. 내가 멀리 빛나는 무엇이 아니더라도 지금 곁에 있는 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큰 빛이 되어줄 수 있는 시절이라는 것을 안다. 나의 기뻐하는 얼굴에 온전히 기쁨으로 화답하는 작은 아이와, 크고도 작은 것을 느끼며 사랑하는 오늘'때에 따라 아름다운' 우리의 전성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꿈'의 다음 이야기는 11월 7일에 공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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