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늦가을 / 옷차림이 점점 더 두꺼워질 무렵
그림 작가 온수와 교육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물꿈이 함께하는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입니다.
'엄마'와 '아빠'라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친구가 만나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나눕니다. 멀고 깊은 이야기도, 가깝고 가벼운 이야기도 담습니다.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는 매월 첫째 주, 셋째 주 토요일에 공유됩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거울 앞에 서서 면도기를 들이대는데, 뭔가 턱 밑에 반짝이는 존재를 발견하였다. 부스럼이 폈나 손으로 거칠게 비벼 봐도 어째 잘 닦이지 않는다. 안경을 고쳐 쓰고 자세히 바라보니... 웬걸, 흰 수염이 난 것이다. 헉! 게다가 주변에 대여섯 개의 흰 수염을 추가로 발견하였다. 2차 헉!
"얘들아, 아빠 이제 흰수염고래랑 친구가 되었어!"
"왜? 왜?" 아이들이 달려온다.
"흰 수염이 나기 시작했거든."
"어디? 어디?"
그러나 아이들은 애초에 흰 수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짧게 자라 까슬거리는 내 턱수염만을 비벼대기 시작한다. 그러고서는 다른 놀거리를 찾아서 올 때처럼 우르르 사라진다.
하긴, 이제 나도 중년의 시기로 접어들었으니 적다고는 말할 수 없는 나이일 것이다. 그 말인즉슨, 받아들여야 할 것은 받아들여야 하는 나이대라는 것이다.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다들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까? 문득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어 진다.
인간은 자신만의 고유한 시간성을 구성하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상대화하기 무척 어렵다. 집 안에서 어린 자녀로 자라났고, 신입생으로 입학했으며, 신입사원으로 입사를 했다. 나름대로 모두 풋풋한 시절을 겪은 것이다. 그러나 그 연속성에 함몰되면 어느 순간 방향감각을 잃게 된다. 어느덧 젊은 세대와 생각도 다르고, 말하는 것도 다르고, 옷차림도 다르고, 같은 것보다 다른 것이 훨씬 더 많아진다. 고유의 시간 안에서 나름 그들과의 동질감을 찾으며 자기 위안 정도는 할 수는 있겠지만, 현실은 자신이 젊은 시절 바라보았던 그 기성세대의 흔적을 그들도 나에게서 발견할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센스가 바로, 낄낄빠빠... 눈치껏 무리를 빠져나오며 느끼는 중년의 당혹스러운 감정은 두 시공간이 뒤틀리며 만드는 일종의 '카오스'일 것이다.
"나 아직 청춘이야!"
평소 이처럼 외치는 노인들을 보면 내심 흉을 보았는데 사실 그에게 있어서 만큼은 그 말이 당위성을 획득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당연히 자신만의 시간성 속에 머물며 최신 유행과 동향을 쫓아 멋지게 사는 모습도 '좋은 삶'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는 자신이 서있는 위치를 명확히 가늠하고 있는 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자연스러움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조급하지 않아 보인다고 할까? 혹은 더 나아가 여유가 있어 보인다고 할까?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시간과 세상의 시간을 이미 적절하게 타협하고 조율한 보이지 않는 균형감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동시에 '비워낸다'는 말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축적된 자아를 게워내는 행위가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지향점은 '케노시스(kenosis)', 즉 무념의 상태를 지향하는 행위라고 한다. 괜히 성인들을 성인이라고 부르겠는가.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는 것과는 반대되는, 축적하고 모아 두고 쟁여두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이상은 극적인 유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중년의 시간은 떨어지는 가속도로 인해 사이드 미러 정도는 힐끔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 같다. 당연히 속도와 방향이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 또한 달라진다.
이러한 중년의 속도감으로 조금씩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니, 문득 맵시 있는 젊은 이들뿐만이 아니라 수수한 중년 남녀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무리에서 떨어져 있는 그 거리와 위치의 감각. 떨어져 있을 수 있는 당당함. 그들의 색 바래 하얀 침묵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이들과 함께 자라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들의 시간에 나의 시간을 끼워 맞출 때가 많다. 나의 '나이 듦'보다는 아이들이 '자람'에 포커스를 맞추고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몇 살이 되었냐가 아니라, 아이가 몇 살이 되었구나로 세상의 시간을 가늠한다. 이에 아이들과 함께하는 엄마 아빠들은 성장과 쇄락을 거울처럼 같이 마주 보고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이것이야 말로 사고의 층위를 넘어서는 '인터스텔라'적 5차원의 시간성 아닌가?
어쩌면 이러한 우주적 시야 획득 과정이 나를 조금씩 케노시스의 영역으로 끌고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흡사 중력과도 같이...
"오빠, 십몇 년만 지나면 엄마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돼" 둘째 아이의 큰 목소리가 나의 정신을 5차원에서 다시 3차원으로 되돌린다.
"야! 요즘에 누가 60대를 할아버지라고 하냐?" 그렇다. 난 아직 케노시스에 다가가지 못하고 욱한다.
말은 그래도 나는 나의 60대를 보고 싶다. 그리고 아이들의 청년 시기를 보고 싶다. 서로 적절한 거리를 두고.
흰수염고래도 그랬을까...
흰수염고래도 자신의 몸이 전과 같지 않게 무거워지자 물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을까? 육지의 일은 육지의 젊은 이들에게 맡기고 홀연히 사유의 바다를 찾아 흘러들어 갔을까? 흰수염고래를 보며 느껴지는 자연스러움과 편안함, 묘한 균형감은 아마도 그가 버리고 비우고 떠났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바닷속의 일도, 우주 안의 일도 결국은 케노시스를 찾아 제 무게를 조절하는 일일 것이다.
'온수'의 다음 이야기는 11월 21일에 공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