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작가 온수와 교육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물꿈이 함께하는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입니다.
'엄마'와 '아빠'라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친구가 만나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나눕니다. 멀고 깊은 이야기도, 가깝고 가벼운 이야기도 담습니다.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는 매월 첫째 주, 셋째 주 토요일에 공유됩니다.
220: 1+2+4+5+10+11+20+22+44+55+110=284
220=142+71+4+2+1 :284
“정답이야. 자 보라구. 이 멋진 일련의 수를 말이야. 220의 약수의 합은 284. 284의 약수의 합은 220. 바로 우애수야. 쉬 존재하지 않는 쌍이지. 페르마도 데카르트도 겨우 한 쌍씩 밖에 발견하지 못했어. 신의 주선으로 맺어진 숫자지. 아름답지 않은가? 자네 생일과 내 손목시계에 새겨진 숫자가 이렇게 멋진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니.”
-요가와 요코, 『박사가 사랑한 수식』, 30쪽
울렁임을 느끼지 않고 숫자의 나열을 썼다. 오늘의 글을 위해 지난 한 달간 내가 들인 노력은 숫자에 다가서는 일이었다. 수학에 대한 거부감이 심한 나는 언젠가 스스로와 약속을 세웠다. 때가 오면 수학 공부를 다시 시작해보기로. 그때란 미루고 미루어 훗 날 내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때이다. 어렴풋한 결심이었지만 오랫동안 되뇌었고 시간에 밀려와 지금 그때에 서 있다.
손가락으로 수를 세고, 곱하고 나누는 ‘산수’의 영역을 넘어 본격적으로 추상적인 것을 계산하는 ‘수학’의 영역에 들어서는 첫날 나는 극단적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중학교 때부터 긴 세월 수학을 싫어한다고 말하며 살아왔으나, 가끔씩 기억을 떠올려 겹겹이 입은 낡은 미움을 하나하나 벗겨보면 겨누어져 있던 불안의 화살은 사실 수학을 향해 있지 않다. 학문 중에 '수학만큼은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절대 굴복할 수 없다.' 결정 내렸던 그 날의 판결과 항거는 지금도 의심 없이 옳은가.
정답을 모두 찍었으나 확률의 법칙을 거슬러 신기하게도 모두 틀려 0점이 나온 날, 성적표에 당당히 깨끗하게 0이 인쇄되어 나올 것을 미묘히 기대했던 날, 부조리하고 소심하기까지 한 이 교육 체제가 차마 0을 인쇄하지 못하고 있지도 않은 점수인 1을 찍어 내보냈을 때 느낀 작은 분노의 불길은 정말 수학을 향한 것이었던가. “나는 수학을 싫어해. 시험에서 0점 받은 적도 있었을 정도야.” 하고 평생 무용담처럼 말할 기회마저 뺏겨버린 슬픔은 수학의 잘못이 아니다.
(땅땅)
유치원 때의 일이다. 학예회 연습을 하는데 감기에 걸려 무용 연습에 며칠 빠진 적이 있었다. 다시 돌아갔을 때 내가 모르는 율동을 익힌 친구들 사이에서 급하게 연습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특히 ‘반짝반짝’이라는 손 모양을 해보라는데 아무리 봐도 따라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최선을 다해 손을 ‘오글오글’ 거려보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모를 수 있냐는 듯이 어이없게 웃으셨다. 처음 본 ‘반짝반짝’은 마법처럼 아름다웠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우리나라 지도를 보고 생각나는 것을 그려보라기에 나는 공룡 트리케라톱스를 그렸다. 지도를 보니 트리케라톱스의 옆모습을 닮은 것 같아 신나게 그렸다. 선생님이 이게 뭐냐고 물어보셔서 설레는 마음으로 트리케라톱스라고 했더니 모르겠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모를 수도 있지.’ 생각하려는 그때 느낀 선생님의 표정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이상하다거나 틀렸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을 어떻게 그렸나 둘러보았더니 모두 무궁화에 둘러싸인 호랑이라거나 달에서 떡을 찧는 토끼를 그린 것이었다. 나는 학교를 빠진 적이 없는데 다른 애들은 언제 같은 것을 배운 걸까? 내가 모르는 새 다른 시간 차원의 학교가 열려 나만 빼고 모두 그곳에 다녀온 걸까 생각했다. 이상하고 무서웠다.
그리고 중학교 수학 수업 날, 방정식의 첫 시간부터 이해가 되기도 전에 앞으로 불려 나가 칠판에 있는 문제를 풀게 되었다. 익숙한 두려움을 느꼈다. 당연히 다른 아이들은 풀 수 있을 것이고 나는 못 풀겠지 싶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뭉개뭉개한 어둠 속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났다. 숫자가 우주을 떠다니는 별처럼 왔다 갔다 거리다 답을 보여주었다. 정답은 ‘1’이었다. 나는 확신했고 이번엔 부끄러움을 모면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그냥 들어가려다가 “정답이 맞지 않나요?”라고 선생님께 물었는데 정답은 맞지만 과정이 틀렸다고 하셨다. 문제를 풀기 위한 정확한 공식이 있는데 내가 적은 공식과 다르다는 것이다. 수학은 답과 공식이 모두 맞아야 정답이라는 것을 알려주셨다. 내가 적은 즐거운 공식이 대화도 없이 하얀 분필 먼지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수학을 완벽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정해진 공식을 이해하는 것도 외우는 것도, 답을 도출하고 또 도출하는 것도 싫었다. ‘수학은 이해하는 학문이다.’라는 말이 가장 울렁이는 거짓말 같았다. 학교에서 수학은 소통 없이 정해진 이해의 시간과 목표와 선이 명확했다.
그렇다면 ‘정해진 이해의 시간’과 ‘목표’와 ‘선’이 없다면, 나는 즐겁게 수학 공부를할 수 있을까.수학은 인간이 발명한 것인가, 자연에 있는 패턴과 규칙을 발견하는 것인가.학교만 졸업하면 더 이상 만날 일없을 것 같았던 수학을 삶 속에서 계속해서 마주치게 된다.
인문학적 사랑과는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았던 숫자를 사랑한다는 철학자를 알게 된다. 음악과 수학 사이의 내연적 관계를 의심해보기도 하고, 계량과 직감의 영역을 적절히 섞어 요리하는 것이 즐겁듯 수학 연산도 즐겁게 해 볼 수 있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수학을 시작하는 아이와 함께 천천히 소통하며 배운다면다시 재미있지 않을까.
선언적으로 이 글을 쓰고 나면 나는 수학 공부를 시작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수와 친해지려고 노력한 요 한 달간 아이는 이미 어깨너머 무언가를 배운 모양이다. 새로 산 화이트보드에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 나오는우애수(友愛數)를 적어보고 있다. 제법 그럴듯한그의뒷모습에,틀리게 적고 있지만 틀렸다고 말해주진 않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