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초겨울 / 뺨이 차가워질 즈음
그림 작가 온수와 교육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물꿈이 함께하는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입니다.
'엄마'와 '아빠'라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친구가 만나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나눕니다. 멀고 깊은 이야기도, 가깝고 가벼운 이야기도 담습니다.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는 매월 첫째 주, 셋째 주 토요일에 공유됩니다.
3년 전 이사를 통해 내 방이 생겼다. 무척 행복한 일이지만 문제는 집이 그리 넓지 않다는 것에 있다. 여러 가족 구성원이 함께 공동의 생활을 함에 있어 이처럼 한 개인이 특정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은 무척 이기적인 행위일 것이다. 해서 앞서 언급한 ‘내 방이 생겼다’는 말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더 정확히는 내가 해당 공간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이 방은 공식적으로는 ‘컴퓨터방’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그 안에 있는 것은 물건들은 죄다 내 것이니 말이다.
문제의 발단은 나의 취미가 적잖이 공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하나 둘 사 모으기 시작한 음반과 책들, 몇몇 악기들이 좁은 방 안에 널브러져 있다. 무언가를 산다는 것은 그 공간을 구매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서의 구매는 도시살이를 하고 있는 이에게 매우 사치스러운 취미가 아닐 수 없다(책의 크기를 보고 주택 평당 시세를 계산해 보시라). 그런 의미로 나는 감히 제 분수도 모르는, (소크라)테스 형이 알면 펄쩍 뛸 인간인 것이다(맑스 형은 퇴근 후 문학 비평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꿈꿨으니 책 정도는 봐줄 것 같다).
이렇게 보면 내가 흡사 물욕이 많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실제로는 특정 영역 외에는 크게 소비의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아마 누군가 매매나 양도 금지를 걸고 포르셰와 세계문학전집을 고르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고를 것이다. 좋은 것을 입거나 먹거나 사용하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다. 그래서 평소 행세도 주변에서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하고 다닌다(혹 불쾌감을 느꼈다면, 사과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내가 소비의 욕망 앞에 떳떳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최근 특정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읽는 속도를 계산치 않고 많은 양의 책을 구매하거나, 문득 구매한 앨범 트랙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늘어가는 것을 보면 나의 소비가 나의 수용 범위를 점차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심히 의심스럽다.
최근에 이런 소비에 대한 깨달음을 줬던 에피소드가 한 가지 있다.
아내나 나나 티브이를 거의 보지 않고 아이들도 티브이를 끼고 사는 편이 아니니 오래되고 조그마한 티브이로도 충분하다 생각하며 버티고 있었는데, 집에 놀러 오신 부모님께서 작고 화면마저 깨진 티브이 앞에 쪼그려 앉아 영상을 보는 손주들이 딱했는지 티브이를 선물해주셨다. 처음에는 큰 화면 속에 펼쳐지는 영상이 마냥 신기했지만 차츰 뭔가 낯설고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적응기가 필요하나 생각하던 가운데 뻣뻣한 내 어깨 근육을 만지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큰 화면과 시야가 맞지 않아 티브이를 시청하는 내내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목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서라도 위치에 맞는 소파가 필수적이 되었다(그렇다. 우리 집에는 소파도 없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아내가 해 준 적이 있는데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고급 백을 사면 그에 맞는 고급 옷을 사야 하고, 옷을 사면 그에 걸맞은 명품 구두를 사야 하고… 풀세팅을 위해서는 끝도 없다며 그래서 자신은 아무것도 안 산다고 했다(그렇다. 그녀는 나의 구루이다).
이상의 깨달음을 실행하기 위해 무단 점유하고 있는 방을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가장 먼저 다시 읽거나 들을 것 같지 않은 책과 음반을 일일이 솎아 내기 시작했다. 한두 시간이 흐르고 나서 돌아보니, 웬걸? 거의 공간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닌가? 살펴보니 정리할 때 '이것은 이래서 버리기 아쉽고', '이것은 이런 추억이 있어서' 등등의 핑계로 극히 제한적인 것만 빼놓았던 것이다. 아이고... 비우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아빠, 책 좀 그만 사!”
어느 날 택배를 통해 책 몇 권이 배달되자 아이들이 버럭 소리를 지른 적이 있다.
“뭐야, 너희도 이번에 새로 나온 마법천자문 샀잖아”
(나도 질 수 없지!)
“아빠 책은 비싸잖아”
(어라?)
“아빠 책은 양장이잖아. 양장! 그래서 비싼 거지. 그래도 오래 보잖아. 오래 보관돼야 나중에 너희도 읽지!”
(후훗~ 어떠냐?)
“나중에 우리가 그 책을 읽을지 어떻게 알아? 우리도 좋아하는 것이 따로 있는데.”
헉! 뼈 때리기 있기 없기? 맞다. 아이들 말이 옳다. 나는 평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내 욕망만을 충족해 왔던 것이다. 책 정리를 하며 문득 이상의 대화가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진짜 전해줄 것은 이러한 클래식 문학 전집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며 나름대로의 현명한 소비 방식, 즉 소유의 집착에 대한 조절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변해(라고 쓰고 '망해'라고 읽는) 플렉스 하는 종교인들도 넘치는 요즈음이지만, 공간이 아름답게 느껴질 때는 그 안이 빼곡히 채워있을 때보다 적당히 비워있을 때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물리적 공간뿐만이 아니라 심리적 공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따지니 문득 이 좁은 방이 지구라는 공간의 은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자신의 물건으로 빼곡히 채워 넣어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공공의 공간을 자신(들)만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는...
"아빠. 정말 올해 안에는 책 사기 없기다!"
"그래, 알았어."
아이들과 새롭게 약속을 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전에도 아이들과 이와 비슷한 약속을 몇 번이나 했고 몇 번이나 어긴 이력이 있는 요주 인물이다. 그래도 이 작은 지구방 안에서 몇 번이고 재도전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무소유란 실제적인 소유보다는 소유의 욕망 자체에서 탈피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걸 아무나 뚝딱 해낼 수 있는 단계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다소 성에 안 찰 지언정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가 점유하고 있는 나의 자리를 내어주기 위한 실천적 훈련이 반복적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그 경지까지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아이들의 미래에 정말 소중한 것은 나무로 만든 종이책이 아닌 나무 그 자체이며, 좋은 녹음 기술로 구현된 악기 사운드가 아닌 새소리와 같은 자연의 소리일 것일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더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집 근처 도서관을 알아봐야겠다.
'온수'의 다음 이야기는 12월 19일에 공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