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작가 온수와 교육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물꿈이 함께하는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입니다.
'엄마'와 '아빠'라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친구가 만나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나눕니다. 멀고 깊은 이야기도, 가깝고 가벼운 이야기도 담습니다.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는 매월 첫째 주, 셋째 주 토요일에 공유됩니다.
아이가 점심밥을 마저 먹는 동안 나는 어제 사둔 포도껍질을 까고 씨를 빼서 알맹이만 그릇에 담고 있다. 포도 껍질을 벗길 때 껍질 안 쪽의 빨간 부분을 남기면서 얇게 벗기면 더 달고 영양도 많다. 옴폭한 그릇에 알알이 쌓이는 알맹이들을 보니 어릴 적 먹던 깐 포도 캔 생각도 나고, 아이가 이 상콤 달콤함을 숟가락으로 담뽁 퍼서 호로록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다. 내가 열심히 포도씨를 빼는 걸 보고 아이가 묻는다.
“엄마, 포도씨가 지금 뭐 하고 있어요?”
포도씨가 뭐 하고 있냐고? 포도씨를 왜 빼느냐고 물었으면 간단히 대답할 것을 왠지 포도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려니 당황하여 내 속마음이 때처럼 묻어난 대답을 하게 된다
큰 실언은 아니겠지만 포도씨를 빼는 동안 은연히 고민한 요즘 관계가 멀어지고 있는 것 같은 사람에 대한 생각이 공연히 포도씨에 투영된 것 같아 부끄럽다. 좋아하고 가까워지고 싶지만 혹시나 그 사람이 나를 불편해할까 살짝 비뚜름히 비켜서 있는 모양이 딱 나다.내 이런 소심함이 아이와의 사소하고 무수한 대화 안에서 얼마나 발현되고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 싶어 깊고작은 한숨을 내쉰다.
내 소심의 기원은 언제부터였을까. 어쩌면 12살의 어느 날이었겠다. 평소보다 일찍 등교를 하게 되었는데 교실에 들어서니 늘 먼저 와있던 단짝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자리에 앉으려는데 아침 인사할 사람이 없는 느낌이 무척 어색했다. 나에게 먼저 인사해줄 다른 친구도 없을 것 같아서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잠시를 견디지 못하고 교실에서 나왔다. 나는 사람이 없는 시계탑 복도 창문에 서서 교문을 바라보았다. 등교하는 아이들을 살피며 친구가 언제 올까 기다렸다. 혹시나 친구가 아파서 등교를 하지 않으면 오늘 내가 혼자가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그 날 나의 모습은 다른 기억들과는 다르게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시선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고민을 마주해한 땀 매듭지었으면 좋았을걸. 이후로 이어지는 학창 시절 내내 나는 이런 상황을 다시 마주하게 될까 남모르게 두려워하기만 했다. 아마도 내가 만년 지각생이 된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학년마다 좋은 친구를 사귀었고 모든친구가 성실 개근하여 그런 날은 다시없었지만 그때부터 생겨난 관계에 대한 내적소심함은 모습을 바꾸어 가며 늘 나와함께 했다.
올해 코로나 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 길어지면서 집에서 아이와 함께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많다. 안으로 엄마로서 역할과 부담은 커지고 밖으로 사회적인 내 모습은 기억나지 않게 희미하고 작아짐을 느낀다. 하던 일을 오래 쉬게 되었고 친분을 쌓아가던 사람들과도 만남이 줄어드니 형체 없는 소심함이 문득 밀려왔다가 또 그것보다 더 실체적인 불안과 바쁜 살림, 아이와 함께 종일 웃고 투탁 거리며 지나가는 시간 속에 쓱 밀려나가고는 한다.
아이는 앞에서 만족스럽게 포도알을 먹고 있다. 나는 내 좁은 마음이 묻은 ‘포도씨의대답’을 조금이나마 희석해보고자, 육아서에서 배운 ‘질문 되돌려주기’ 기법을 활용해본다.아이는 포도씨에 대해 나와 다른 어떤 해석을 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까, 네가 엄마한테 포도씨가 뭐 하고 있는지 물어봤었잖아. 그럼 너는 어떻게 생각했어?”
아이가 빙긋 웃으며 잠시 생각한다. 나는 괜히 긴장하며 귀를 기울인다.
“저는 포도씨가 포도가 더 달콤해져라 하고 있고,또 내가 맛있게 먹으라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와, 그렇게 생각했구나!"
아이의 기쁜 표정과 대답이 좋아 같이 웃는다. 그리고 속으로 매우 더 감탄한다.
‘단순하다. 명확하다. 즐겁다. 배우고 싶다. 그리고 이 포도씨 또한 왠지 나 같다!’
아이의 말을 들으면 마음이 개운해진다. 아무튼 포도씨는 노력하고 있고 소중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달콤한 포도알 보다 포도씨에게 더 관심을 두고,엄마에게 생각할 수 있는 질문까지 던져준 이 아이는 진정 현명한 나의 벗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도 팔불출 해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