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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꿈 Jul 24. 2021

오, 브라이언

한시적이라는 것의 아름다움

어린 시절부터 ‘비틀즈’ 팬임을 자처해 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비치 보이스’의 음악을 듣는 일이 월등히 많아진다(물론 그 둘이 병립할 수는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사소하게 고민하다가 조금은 가닥을 잡았는데 그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에 대한 대답은 나도 이제는 청년기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비틀즈와 비치보이스를 계속 비교해서 미안하지만(윌슨 형님, 운명이라 생각하세요. 그래도 그 시절 참 즐거웠잖아요). 두 팀의 음악은 공통적으로 뭔가 이중적인 부분이 있다.     


이하는 폴과 브라이언의 음악을 나눠 살펴보자. 비틀즈와 비치 보이스가 끊임없이 비교되던 중후반기 비틀즈의 조타수는 누가 뭐라 해도 단연 폴이었다. 비치 보이스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폴(류)의 음악은 특유의 낙천성이 그 안에 배어있다. 단조의 음악에서조차 뭔가 삶을 긍정하는 이의 일시적인 자기 연민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반면에 브라이언의 음악은 특유의 비관성이 숨어 있다. 밝은 서핑 뮤직을 연주하고는 있지만 '음, 난 서둘러 이 여름(절정)이 끝날 것을 알고, 아마도 곧 서핑은 할 수 없게 될 거야'라는 생각을 가슴 깊이 박고 있는 회의주의자와도 같은 인상의...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후기의 행보를 이미 다 알고 있기에 너무 쉽게 일반화시키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음악을 들으면 느껴진다. 비치 보이스의 음악에는 비틀즈의 음악에는 없는 '한시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 2분 대의 팝 트랙은 뭔가 자기완성을 지향하다가도 곧 페이드 아웃된다. 이제 막 피부가 햇볕에 그을리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끝나는 한여름의 날처럼. 순간적이고, 그렇기에 허무하다. 허무하기에 동시에 아련하다.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의 아련함이 바로 이런 것일까?     


적어도 폴은 자신의 페르소나를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기가 끝나면 서둘러 무대 뒤에서 화장을 지우고 껄껄거리며 사람들과 어울려 즐거움을 찾아 극장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적어도 브라이언은 그런 것에 익숙지 않았다. 무대 밖에서도 무대 안의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다. 그 감정을 고스란히 안고 뭍사람들을 외면한 채 자신의 방에 들어가 그 감정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폴은 노련했고, 브라이언은 서툴렀다. 폴은 언제나 자신만만했고, 브라이언은 아슬아슬하게 자신만만한 척했다. 폴은 모든 이들 가운데서도 단독자였고(심지어 옆에 존이 버티고 있어도), 브라이언은 가족(데니스와 칼)과 친척이 밴드에 함께 있어도 끝까지 그것을 공유하지 못했다.


많은 이들이 브라이언의 신경과민에 대해서 이야기하길, 폴에게는 존이라는 파트너가 있었지만 브라이언에게는 아무도 없었다는 식의 해석을 하는데, 개인적으로 옳은 것 같지는 않다.     


폴은 오히려 단독자에 익숙했다면 브라이언은 지나치게 의존적이었다. 그것이 사람이건 술이건 약이건 간에. 파트너에 기댄 것은 항상 브라이언이었다(브라이언의 음반에 명기된 많은 음악적 파트너들을 생각해보라).     

브라이언의 잘못된 파트너(?) 덕분에 비치보이스의 음악은 점점 아슬아슬해졌다. 이런 말은 잔인할 수 있겠지만, 그럴수록 그의 음악은 묘하게 아름다워졌다. 그 불안성이 비치보이스의 음악에 색을 입혔다. 그리고 비치 보이스 음악의 위대성은 완성지향에서보다는 그러한 미완성의 측면에서 도드라진다(그러한 의미에서 'SMiLE' 앨범은 가장 완성도 있는 비치보이스의 음반이라고도 할 수 있다)     


‘Summer's Gone’     

https://youtu.be/NHbKUyq5m_w

그렇다. 미완성의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여름은 곧 끝나고 인생의 황금기도 너무 빨리 달아난다. 한시적으로 열었던 해변의 노점들도 입구에 판자를 대고, 서퍼들은 검게 그을린 얼굴로 고향으로 가는 티켓을 구매한다.     

계절은 돌아오지만 생은 되돌릴 수 없다.     


비틀즈의 음악이 총기 어린 젊은이들의 놀라운 열정의 결과물이었다면    

 

비치 보이스의 음악은 심약한 어른들의 진지한 역할놀이 같은 측면이 있다.     


위대한 음악은 시대를 넘어 언제나 존재하겠지만     


더운 여름, 비치보이스의 음악에 심취한다는 것은 어쩌면     


삶을 너무 모르거나, 혹은 삶을 너무 알아버린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들의 음악은 그 모든 양극을 긍정하고 있다. 서핑을 하거나(Surfin' U.S.A.)  서핑을 끝내거나(Surf's Up), Whatever...     


이 아이러니컬한 회의주의자의 긍정이란,     


이상하게도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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