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의에서 벗어난 사회의 가능성
최근에 한 기사 속 사진을 보고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그것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는 한 이가 공개한 가족 모임에서 국민의례를 하는 모습이었다. 일종의 코미디 같은 에피소드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섬뜩함을 지울 수 없다. 한 국가의 리더가 되겠다는 이들의 가치 인식이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역행하는 수준이라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실로 막대한 장애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는 반대로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2020 도쿄 올림픽’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젊은 세대들은 눈에 띄게 과거와 결별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들은 더는 국가를 위해 뛰지 않는다.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통탄하거나 국민께 사과하는 등의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몇몇 국가는 아직도 그러한 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는 비교되게).
어떻게든 한국이라는 나라를 (비교 우위에서)알려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했던 과거의 세대와는 다르게 젊은 세대는 주체성을 기반으로 일종의 안정감과 자신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한국이라는 나라의 경제적 지위 상승과 함께 민주화 과정 속의 일어난 사회적 공동학습 요소가 크게 작용할 것이다.
결승전에서 자신을 이긴 일본 선수의 손을 직접 들어주는 모습, 메달에 실패해도 괜찮다고 도전 자체가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는 선수들의 태도는 타인과의 경쟁이 아닌, 자신과의 도전을 기꺼이 택하며 실제 올림픽의 정신에 한 차원 더 나아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의연한 선수들의 모습이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리는 것보다 훨씬 더 자랑스럽다. 이처럼 눈앞의 태극기가 사라져야 비로소 가슴 속의 태극기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반응이다. 과거처럼 ‘어떻게 일본에 질 수 있냐’, ‘왜 이런 기회를 놓치냐’ 등등 더는 단순히 경기 결과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시민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모습 자체를 격려하고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부적으로 이런저런 문제가 없지는 않다. 때아닌 페미니즘 논란 등을 보면 여전히 잔존해 있는 사회적 응어리들이 엿보인다. 그러나 올림픽 세대를 바라보는 것처럼 나는 다소 희망적이다. 국가주의에서 서서히 탈피한 젊은 세대는 동일하게 다양한 사회적 담론을 통해서 해당 이데올로기들도 잘 정리해나가지 않을까? 페미니즘 또한 시민성의 확대와 더불어 건강하게 수용되고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일종의 균형 찾기처럼.
이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국가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하다. 특히나 전 지구적인 문제들이 발생하는 요즘 같은 시기에는 더더욱 시민사회나 공동체가 생활의 모든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그렇기에 과거 박근혜 정부의 태극기 사랑과 같은 행정은 정말 국가가 사회 진보를 얼마나 가로막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지 않을까 싶다.
사회는 얼마나 과거의 향수에 자리를 내어줄 것인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나는 그것이 사회적·국가적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가족 모임에서 국민의례를 하는 모습보다는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는 포틀럭 파티가 훨씬 바람직하고도 지속가능한 가족애를 보장한다고 생각한다. 올림픽이건 여느 국가 행사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대선도 저 높은 곳에서 홀로 고고히 먼저 바라보고 있는 현인 같은 리더는 나는 차마 바라지 않는다. 다만 시민들의 어깨에 발맞춰 걸을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을 바랄 뿐이다. 이 또한 과욕이라면 별로 할 말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