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태용량 초과의 날' 그 후... 우리가 돌아봐야 할 가치
예전에 부모님께서는 종종 저에게 '빚지고 살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했습니다. 어린 나이였기에 그 언질의 깊은 내막은 잘 몰랐으나, 빚을 진다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이라는 인식이 깊이 박혀 지금도 누군가에 신세지고 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최근 뉴스를 확인하니 우리는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합니다. 글로벌 생태발자국 네트워크(GFN)는 1971년부터 지구가 1년치 탄소 자정 능력을 언제 잃어버리는지를 계산한 '지구 생태용량 초과의 날'을 공개해왔는데요. 바로 며칠 전인 7월 28일이었습니다.
인류는 그날 부로 지구의 1년치 자원을 모두 소모해 이후에는 다음 세대들이 써야 할 자원을 앞당겨서 쓰고 있다고 합니다. 더구나 올해 '지구 생태용량 초과의 날'은 집계가 이루어진 이래 가장 이른 날짜로, 지난해(7월 29일)에 비해 하루, 1971년(12월 25일)에 비해선 5개월가량 앞당겨졌다고 합니다.
'지구 생태 부채'에 기여하는 비율은 국가에 따라 다르다고 하는데요. 놀랍게도 한국은 동일한 기준으로는 4월 2일, 그러니까 식목일 보다 먼저 지구 생태 부채에 빠진다고 하네요. 내일을 준비하는 나무를 심기도 전에 오늘 남은 나무를 다 사용한다는 뜻이에요.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빚을 지며 살게 되었을까요? 오늘의 문제를 계속 외부화하거나, 그저 보이지 않는 미래에 떠넘기는, 흡사 눈 앞에 있는 것을 당장 사고 싶어 내일의 나에게 그 책임과 의무를 전가하는 '일단 카드 먼저 긁자' 하는 소비 방식을 저 스스로 돌아봅니다. 우리는 지금껏 너무 낙관적으로 살아온 것은 아닐까요? 정치에 의존하며, 기술과 산업에 의존하며, '우리는 반드시 길을 찾을 것이다'라는 막연한 희망 같은 것에 기대며 말이죠.
최근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고 있는 영국의 사정도 이미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40도에 육박한 기온은 원래 학자들이 2050년에 예상한 이상기후였는데요. 2022년에 이미 나타났습니다. 무려 약 30년을 앞당겨 말이죠. 모든 인류가 '빨리, 빨리, 더, 더'를 외칠 때, 이러한 부정적인 현상 또한 '빨리, 빨리, 더,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굳이 멀리 해외 사례를 들 필요가 있을까요?
한국에서도 점점 더 더워지고 추워지고 하는 이상 기후를 시간이 갈수록 더욱 체감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국제적인 차원에서의 여러 기후 협약이 이루어지고, 기업의 ESG의 목소리는 커져가고 있으나, 솔직히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지고 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하다하다 '화성 테라포밍' 이야기도 나오고 있으니까요. 이것이야 말로 시쳇말로 '먹튀'가 아닐까요?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금 '공동체'에 대한 생각으로 회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구라는 공간성에 묶인 공동의 목적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만큼 '상호간의 약속'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가 환경 실천이라는 것을 대단히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는 합니다.
친환경적 실천이라는 것에 별도의 엄청난 윤리성이나 도덕성이 요구되지는 않습니다. 단순하게는 지구라는 '공공의 공간'을 어떻게 우리가 서로 긍정적으로 영위하고, 나아가 공존하며 살 수 있는가라는 고민의식에서 출발하면 훨씬 더 이해와 접근이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친구들과 같은 숙소에서 살고 있다면 본인들 나름대로의 질서와 규약과 매너를 구성하겠죠. 이처럼 공공의 약속을 구성하는 이유는 이곳이 나만이 누리고 있는 '내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결국 우리가 말하고 있는 시민의식과 동일한 형태라 생각합니다. 환경실천이라는 것이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약속'과 같은 것 아닐까요? 물론 위기의식은 서로 다르겠지만, 이것은 좋고 싫고의 선택이 아니라 내가 이곳에 계속 온전히 살기 위해 '해야만 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지속적으로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공감대의 형성이 환경적 실천의 기저일 것입니다.
누울 자리 다 차지하며 온전히 공간을 누리고 싶다는 욕망을 통제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좁은 공간에서 몸을 비집고 잠이 들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변에 좁게 자는 친구를 위해 조금씩 그 공간을 내려 놓을 때야 비로소 몸은 좀 불편하더라도 빚진 것 없이 맘 편히 잠들 수 있는 방법일 것 같다는 생각을,
빚지며 사는 오늘 문득 해봅니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s://omn.kr/203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