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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람 Jun 13. 2024

무례한 친절

개신교인으로서의 고민 

전일, 오랜만에 2,3 년차 선생님들이랑 4개월 만에 회식 아닌 회식을 했다. 원래부터 다들 성실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모두 틈틈이 알바 및 자기계발 하면서 무난하게 지내고 있었다. 3년차 선생님이 나에게 요즘 교회에 다니고 있냐고 물어보았다. 


"아, 그게 여기 근처 교회에 새신자 등록을 하기는 했는데.. 좀 안 맞아서 다른 교회 온라인 예배로 듣고 있어." 라며 대충 얼버무렸다. 


질문을 던진 선생님은 작년 한 해 중 8개월을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며 많이 친해진 선생님인데, 근무 중단 후, 쉬게 되면서 자아 성찰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교회를 다녀 보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나는 


"자아 성찰을 위한 거면 교회 보다는 절이 더 낫지 않을까? 교회는 친절하지만 무례해서 접근하기가 어려운것 같아."


라고 했다. 말을 내뱉고 나니, 순간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박혀 돌아 가신 후, 예수님을 3번 부인한 베드로 급으로 배신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렇게 말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년차 때는 매주 일요일 당직이라 전혀 예배를 참석할 수가 없었고, 2, 3년차 때는 새신자 등록은 하지 않고 병원 근처의 교회에서 예배만 드리고 있었다. 이번에 병원 근처로 다시 올라오게 되면서 교회에 새신자 등록을 하고 다녀야지 결심하고 교회 로비의 등록처에 갔다. 근데,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하는 것 아닌가. 


병원에서 수술방이든 병동에서든 사진을 주구장창 찍는 성형외과에서 일하고 있어서 보통 사람들이 사진에 매우 예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조건 환자에게 사진을 찍기 전 찍어도 되는 지에 대한 동의서를 받고, 사진을 찍을 때도 개인 신상을 판별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삭제하거나 가리는 것을 중요시 한다. 목사님만 보시는 거라면서 벽에 나를 세워 두고 사진을 여러장을 찍는데, 찍히는 동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예배가 끝나고 새신자들을 관리하시는 것으로 보이는 집사님이 청년부 전도사님한테 나를 인계하였는데, 탁자에 새신자들의 정보가 적힌 카드에 사진이 떡하니 붙어 있었다. 분명 목사님만 보시는 거라고 그랬는데, 그렇게 여러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 사진을 올려둔 것이 신경이 쓰였다. 내 카드에는 사진이 붙어 있지 않았는데, 카메라에 있던 파일이 본인 실수로 날아갔다며 사진을 다시 찍어야 한다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제발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냐고 여쭤 봤는데, 사진은 꼭 찍어야 한다며 옆모습을 기여코 찍어 가시는 것을 보고, '그래, 교회가 원래 이랬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청년부 예배를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내가 작성한 새신자 카드를 확인하였다. '세례교인' 항목에 크게 동그라미를 친 것과, '세례일 : 2016년 9월'이 내 눈길을 다시 사로 잡았다. 교회에 다닌지도 벌써 10년, 세례를 받은 지도 8년이 되었다. 교회를 다니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부어주신 것 까지도 인정하게 되었지만 나는 아직 교회가 불편하고 개신교를 적극적으로 전도하지 못한다.

 

내가 태어난 도시는 전국을 통틀어 인구 대비 절이 가장 많은 도시이다. 천주교, 개신교 신자도 물론 많지만, 불교가 가장 접하기 쉬운 곳이다. 엄마는 내가 수험생이 되자 수험기도를 위해 절에 가기 시작 하셨다. 내가 3수를 하게 되자, 3년 간 수능 날마다 절에 가서 기도를 드렸고, 3년 터울의 동생이 연달아 3수를 하게 되자 총 6년간 수능 날마다 절에서 기도를 드렸다. 그 사이에 엄마는 법명을 갖게 되었고, 불교인이 되셨다. - 남들에 비해 3배의 시간이 소요 되었으나, 나는 의사가 되었고 동생은 치과 의사가 되었으니 엄마의 6년간의 기도가 효험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다. - 자연 속에 위치한 절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예과 때까지는 절에서 하는 노인들을 위한 무료 급식 봉사활동에도 여러 번 참석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나는 불교 문화가 어색하지 않고 친숙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삼수가 끝날 때 까지 염주를 끼고 다녔던 내가 개신교인이 된 과정을 살펴보면 개인적으로는 신기하다. 회심한 이유로 댈 것들은 많지만, 사실 결정적인 것은 또 없었던 것 같아서 결국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게 된다. 웃긴 건 내가 교회를 다니면서 개인적으로 힘든 일들이 더 많아졌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 힘든 시기에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이 유일하게 종교였기 때문에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시간들을 버티는 동안, 성경의 말씀들과 같이 하나님을 믿었던 친구들의 기도가 나를 갈고 닦아줘서 누군가가 보기엔 내가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되었는데, 이 종교를 내가 아직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마음껏 사랑해 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슬프다. 


오늘은 친한 친구의 집들이 방문을 위해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책을 읽고 가던 나에게 옆의 할아버지가 말을 건네셨다. 78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굉장히 자세도 곧고 깔끔한 행색의 노인 분이었고, 자신은 책 읽는 사람을 매우 좋아한다고 하시면서 직접 산 책인지 물어보셨다. - 보고 있던 책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였다. 내용이 너무 어려워 읽은 지 1달이 되어가는데 반도 못 읽었다. - 입고 계신 캐주얼한 양복의 상의에 십자가 뱃지가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교회에 다니시는 분으로 추정이 되었다. 같은 교인을 만났다는 반가운 마음 반, 그리고 또 다시 무례한 친절을 느낄까봐 두려운 마음 반이었다. 


공무원 생활을 37년 하며 출세는 하지 못했지만, 딸과 아들을 모두 잘 키워 내신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고, 이북 출신이라 괄괄하긴 하지만 자식들을 모두 잘 키워 준 아내분과 함께 살며 매일이 행복하시다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지인을 통해 노인일자리지원사업에 참여하게 되어 근무하러 가는 중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훈훈한 말씀을 이어가다가 고향은 어디냐고 물어보셔서 원래 집이 경상도 쪽이라고 말씀 드리니 경상도 사람들이 참 좋다고 하시면서, 거기 사람들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싫어하지 않냐고 말씀하셨다. '공무원 출신이신걸 감안하면 당연히 현 정부에 엄청 친화적이실텐데..' 라고 생각하자 마자, 현 정권 대통령이 참 훌륭하고 좋은 사람인데, 정치를 잘 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하며, 대통령 칭찬을 지속하셨다. 현 대통령에 대해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지만, 이분이 내가 사직 전공의 인걸 알면 경을 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노인 분의 도착 지점에 거의 다 와가는 중이었는데, 갖고 있던 종이봉투에 내 번호를 적어 달라고 말씀하셨다. 대화 중에는 직장이 없다고 말씀드렸지만, 인연을 이어가게 되어 혹시 원래 내 직업을 말하게 되면 오랜 설교 시간이 이어질 것 같아 번호를 적지 않으니, 그때부터 내리기 전까지 한 10번은 넘게 본인 전화번호를 읊으시면서 도움 필요할 일 있으면 도와줄 테니 꼭 연락 달라고 말씀하셨다. 백수청년을 도와주고 싶으신 할아버님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지만, 큰 실망을 드리게 될 것 같아 뒤에 연락은 드리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3장은 기독교인들에게 '사랑장'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고, 고린도전서 자체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의 화해와 사랑을 유도하는 바울의 설교 말씀이다. 기독교인들끼리 연애를 하게 되면 지침서처럼 자주 보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교회 내에서 다툼이 있거나 분란이 있을 때 목사님들이 항상 가져다 쓰는 성경 말씀이기도 하다. 같은 성도들의 따뜻한 관심이 내가 힘들 때 위로가 된 적이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과한 관심이 나를 규제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고,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는 한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도강(도둑강의) 처럼 도예(도둑예배)만 드리게 되는 것 같다. 


고전 13장 4절 말씀 - 사랑은 오래참고 친절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잘난체 하지 않습니다.- 라는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결국 내가 위에서 말했던 이 사람들보다는 낫다는 오만한 생각 때문에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이 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무례한 친절 자체도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오직 답이고, 옳다는 오만한 생각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 아닌가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귀가 얇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굉장히 많이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면서도 갈등이 시작되는 그 순간에는 고집을 꺾지 못하고 욱하는 성격이 있다. 다툼이 발생한 뒤, 그 때 했던 대화를 곱씹으면서 내가 어떤 말을 잘못했고, 상대방이 어떤 부분에서 속상했을지, 고민하고 화해를 청하지만, 이미 상대방이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건내는 화해의 손이 아예 무시를 당할 때도 있었고, 오히려 상처가 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다툼 자체를 줄이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고 있다. 내가 항상 옳지는 않고,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순간적으로 방어적인 반응이 덜 나오게 되는 것 같다. 싸울 때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호감을 표현할 때도 내가 이렇게 하면 상대방이 무조건 좋아해 줄거라는 생각을 줄이게 된다면, 그 행동이 무례한 친절이 아니라, 친절로서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다른 개신교인들이 잘못되었다는 나의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친절하며 오래 참고 견디며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당당하게 교회에 관심을 갖는 주변 친구들에게 "우리 교회 한번 올래?"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개신교인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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