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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람 Oct 23. 2024

인지부조화와 확증 편향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지난 주말 교통사고를 겪고 당일에는 나의 무과실을 확신했는데, 오늘 지구대에 가서 직접 영상을 확인하니 사고 경위가 나의 생각과 아예 달랐다. 전방주시를 잘 하지 못해, 상대방이 옆 차선에서 내 차선 쪽으로 차선을 바꾸는 선행차량이었던 것도 당일에는 전혀 알지 못했고 부딪힌 시점도 아예 잘못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지금까지 영상만 보면 상대방 과실이 더 커보이는데, 보험사가 어떻게 판단할 지는 계속 예의 주시하고 있어야겠다. 이런 사소한 사고의 순간도 내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잘못만 생각하는데,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더 얼마나 자주 이런 판단을 고수하고 있을지 한번 더 고민해 보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다 읽었다. 그녀의 부커상 수상 작품인 '채식주의자'를 두 번 읽었지만 그리 재밌게 읽지는 못했다. 내가 재밌게 읽은 다른 부커상 수상작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인데, 이 책 또한 편하게 읽을 작품은 아니라서 부커상을 만든 영국인들 취향이 이런 불편한 사람 심리를 꿰뚫는 작품들을 좋아하는 가보다 생각했고, 한강 작가님의 소설책은 그 뒤로는 펼쳐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작별하지 않는다' 라는 책을 쓰고 작성한 '출간 후에' 라는 글에서 남긴 "매일 시집과 소설을 한 권씩 읽는다. 문장들의 밀도로 다시 충전되려고." 라는 문장을 보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일로 밀도 있게 충전 시키는 사람은 또 어떤 글을 쓰는 지 궁금해졌다. 이전에 어머니가 읽고 추천해 주신 '소년이 온다'를 구매해 펼쳐 들었다. 


책은 5.18 광주를 겪은 6명의 화자들이 각자의 사건 이전과 이후의 삶을 나열해 나가는 구성이다. 화자는 어린 소년이기도, 죽은 소년의 혼이기도, 모진 고문의 희생자들이기도, 도망간 사람이기도, 그리고 어린 소년을 떠나보낸 어머니이기도 하다. 마지막 어머니의 시점에서 그린 '꽃 핀 쪽으로'는 책을 읽는 첫 페이지 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쉬지 않고 눈물이 흘렀다. 화자는 모두 다르지만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마음과 일체화 되어 한 문장 한 문장을 써내려갔을 작가의 노력이 느껴졌다. 사실 노력이라는 단어로도 표현하기 부족한 어떤 그녀의 의지가 느껴졌던 것 같다. 


제주 4.3 사건과 광주 5.18 사건을 두고 작품을 써내려간 그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두고 그녀의 작품들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수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스웨덴 한림원 앞에서 시위를 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들이 신봉하는 권력자의 모습과 반대되는 모습은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많은 사람들과 기록들이 증거하고 있는 것들을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면 아예 보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지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확증편향을 저지르는가? 


지금의 의정갈등 사태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정부도, 의사들도, 시민들도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부는 지금의 '의료개혁' 이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지역간 의료 불평등'과 '공공보건의료'에 대한 실천적인 대안은 전혀 없는 채로 '의사 수 부족' 과 '의대 증원'의 프레임만 내세우는 그들이 과연 의료를 개혁하고 있는 것인가? 정부의 정책은 국가의 변화는 전혀 담보로 하지 않고 오직 의료계의 변화만 촉구하길 원하며 결국 이런 의사 수의 증폭은 의료의 시장화와 민영화로 연결될 것이다. 


의사들 역시 자신들의 시야에 갇혀 서로 신뢰하지도 못하고 앞장서 움직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시민들은 아직 의정갈등 문제가 진행 중인 것도 모르며, 증원이 이뤄지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어떤 미래가 기다릴 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들은 너무 바쁘다. 내 한 몸, 나의 가정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며, 나를 지키기 위해서 불편한 정보는 저절로 외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정보들만 받아들이게 된다. 포털사이트에 아무리 많은 기사들이 나열되어 있어도 접근하기 쉽고 읽기에 불편하지 않은 가쉽거리들만 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되돌아 볼 시간이 없다. 


이런 '성찰'이 부족한 시대에 우리는 계속 변함없이 살아가도 되는 것일까? 아주 작은 사고에서도 내 입장만 고수하고 제대로 된 진실을 보지 못하는데, 더 큰 문제에 있어 우리는 언제쯤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될 수 있을지 염려가 된다. 나 또한 지금 이 사태에 있어 나에게 유리한 확증편향만을 보려는 면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안다.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이리 안에서 사는 양들은 비둘이 같이 순결해야 하지만 또한 뱀 같이 지혜로워야 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한 뱀의 성향을 예수님이 모르고 비유한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이 비유는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잘 판단해야 한다는 말처럼 느껴진다. 제대로 된 판단은 결국 많은 것을 듣고 보는 것을 통해서 가능한 것 같다. 듣기 싫다고 해서 귀를 막지 않고,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눈을 막지 않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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