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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람 Oct 12. 2024

퍼펙트 데이즈

주말에 친구와 북한산 등반을 갔다가 하산하는 길에 발목을 삐었다. 중학교 때 급식실 가는 길에 운동장의 높은 계단을 뛰어 내리다가 인대가 늘어난 뒤로 자주 발생하는 증상이다. 초, 중, 고 때 성적 전교 1등은 해본 적 없지만, 급식 전교 1등은 몇 번 차지한 적 있는데, 발목 염좌는 그때 생긴 매우 영광스러운 상처라고 할 수 있다. 30대가 넘어서는 처음 생긴 염좌라 거의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는데, 정말 이렇게 누워 있어도 되는 구나 싶을 정도로 계속 누워 있었다. 이번주는 하루종일 중간 중간 잠에서 깨서 된장국 끓이고 밥먹고 다시 잠들고, 국 끓이고 먹고 다시 잠들고의 반복이었다. 발목이 성했을 때는 그래도 2시간씩 유투브를 보며 홈트레이닝을 했는데, 발목에 무리가 갈까봐 복근 운동이나 15분 정도의 짧은 운동만 하고 있다. 그래도 가끔 발목이 욱신 거려 나이가 드니 회복 속도가 느리다는 것을 제대로 체감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시민건강연구소에서 하는 의료개혁 강좌는 꼭 참석하고 싶어서 화요일 저녁에는 용산에 가서 오프라인 강의에 참석했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학 교수님의 강의 내용도 좋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서 치즈케이크를 사왔는데, 카운터 직원 분께서 마감시간이라고 덤으로 남은 오믈렛 타르트까지 손에 쥐여 주셨다. 지하철에서 치즈케이크 한입을 물었는데 머리 끝부터 발끝 까지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맛있었다. 덕분에 행복한 마음이 한가득 채워져 용산에서 부평까지 걸리는 1호선의 1시간이 거의 15분 처럼 느껴졌다. 발목 때문에 장보러 나가기도 곤란했는데, 덤으로 쥐어 주신 오믈렛 타르트 덕분에 다음날 아침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수요일에는 그렇게 하루 종일 잠자고 일어나고를 반복하다가 저녁에는 동생과 오랜만에 긴 카톡을 주고 받았다. 동생이지만, 나에게는 언니 같기도 하고 세상 제일 든든한 내 편인 동생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위로가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동생을 웃게 해주고 싶어서 시덥잖은 농담을 몇개 던졌는데, "언니짱!"이라는 동생의 답변을 보니 세상을 한 가득 얻는 것 같았다. 사람은 어쩌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죽지않고 몇 년의 세월을 버티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요일에는 똑같이 된장국을 끓이고 먹다가 유투브를 통해 서울대 의대 비대위와 대통령실에서 토론하는 모습을 보았다. 결국 양측 모두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토론회 자체가 청중을 시민으로 대상하여 좀 더 쉬운 말로 이 사태의 문제와 각자의 의견을 전달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 노력을 감안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했는데, 의사 내부에서는 왜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대다수여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저녁에는 오래전에 잡은 밥 약속이 있어 버스를 타고 부평역 앞의 피자가게에서 같이 근무하던 외과 전임의 선생님을 만났다. 이 사태 때문에 대학병원에서 나오시고 현재는 로컬 외과 병원에서 일하고 계시는 중인데, 의정갈등 사태의 끝없는 지속 때문인지, 일이 맞지 않으신 건지 예전보다 핼쓱해 지신 것 같은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식사를 마치고 강아지가 있는 카페에서 강아지를 쓰다듬는 선생님이 그 날 중에 가장 행복해 보이셔서 조금 더 마음을 기댈 곳이 있으셨으면 덜 힘들지 않으실까란 생각이 들었다. 강직하신 분이라 항상 본인이 생각하는 옳은 길을 가고자 하시는데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살기에는 야박한 곳인 것 같다.


오늘은 한강 작가님이 노벨 문학상을 탔다는 경사를 듣고 바로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독서를 참 좋아하셔서 나에게 독서 습관을 조성해 준 기틀이 된 분이시다. 나는 작가님의 '채식주의자'만 읽고 장벽을 느껴서 다른 책을 읽어 보지 못했는데, 어머니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정말 흡입력 있게 읽으셨고 다 읽고 나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하셨다. 통화를 마치고 몇 시간 뒤에 어머니의 카톡 프로필이 한강의 '소년이 온다'로 바뀌어 있어 어머니 또한 정말 기쁘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역사 왜곡이라고 불리며 사실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아픈 과거가 이런 기회로 세계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어 기쁘고, 이것이 덮고 없애야 할 기억이 아니라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가 돌아봐야할 기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침대에 누워 있던 시간이었지만, 반복된 청소와 상차림 속에서 중간중간 만나게 된 새로운 인연과 오랜만에 만나고 연락한 사람들 덕분에 정체되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계속 살다가 죽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 안에 '계속 이렇게만 지내면 안되는데..' 라는 소리도 점점 크게 들려온다. 인생은 사람에게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일들의 연속이지만 그 안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사람의 장점이 아닐까. 변한 것은 없지만,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불쑥불쑥 솟구친다. 다음주에는 또 어떤 소소한 행복이 있을지, 그리고 또 어떤 만남들이 있을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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