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나답다

by 한박달

고1 생일선물로 오디오를 선물 받았다. 덕분에 처음으로 집에서 CD를 들을 수 있었다.


전까지 대우 더블 카세트 데크로 음악을 들었다. 구입 당시 오토리버스 기능의 하이테크 제품이 분명했으나 CD까지 플레이할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서태지와 아이들 2집 CD를 듣고 트랙 이동과 구간 반복의 마술에 마음을 뺏겼다. 하지만 우리 집엔 없는 게 많았다. VTR도 전자레인지도 CDP도 없었다. 어머니의 기준은 주관적이되 확고했고 본인이 생각할 때 없어도 되는 건 굳이 사지 않았다. (물론 어머니의 기준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쓸데없이 많았지만.) 꽤 오랜 시간 CDP의 필요성을 이야기했고 고 1 때 그 숙원을 풀었다.


그때의 결핍 때문인지 난 지금도 CD가 가장 편하고 좋다. (음질이 따뜻하다는 등 이유를 들며 LP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게는 LP에 대한 추억이 1도 없다.)


어느 날 친한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그때 우리 집엔 펜티엄도 아닌 486 컴퓨터가 있었고 친구는 정말 궁금한 표정으로 넌 대체 뭘 하고 노냐고 물었다. 그때 난 오디오를 켜고 smahing pumpkins의 앨범을 틀었다. 노래 들으면서 책 본다고 답했다. 그때 그 애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기억난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그 친구가 지었던 표정과 비슷한 표정을 여러 번 목격했다. '너는 음악 듣는 게 좋니?' '그 책 재미있니?'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에 뿌듯했던 적도 있지만 또 가끔은 기분이 나빴다. '내가 너무 단조롭게 살고 있나?'


취업 준비가 1년 넘게 이어질 무렵 친구들이 지었던 표정이 떠올랐다. 자존감이 내려갈 때 특히 많이 떠올랐다. '책과 음악이 무슨 소용인가? 그것들이 내 현실감각을 없애는 통에 정작 해야 할 걸 못했다'


그리고 지금 난 여전히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게 취미활동의 대부분이다. 그것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나답다.


어제 춘천마라톤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유튜브를 보는데 윤상의 노래가 나왔다.


윤상의 cliche 앨범은 사실 살 앨범이 아니었다. 윤상보다 김현철이나 윤종신을 훨씬 좋아했었다. 그런데 더블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가격은 1장 가격이었다. 가성비를 생각하며 고심 고심하다 결국 샀다.


가성비는 좋았을지 몰라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분위기는 멋있었지만 어른의 감성이라 느꼈고 공감이 되지 않았다. 내가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른 중반을 넘어 다시 들어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재미없게 들린다. 음악은 아이와 어른의 감성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이런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과 관심 없는 사람으로 나뉠 뿐이다,


그러고 보니 난 중고등학교 시절 어른이 되면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며 평판이 좋은 예술작품(빔 벤더스의 영화, 윤상의 앨범 등)에 대한 평가를 보류했다.


그러나 그때 모르겠는 건 지금도 모르겠고 그때 잘 아는 건 지금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back to the real life는 노래방 애창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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