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일요일마다 대중탕에서 때를 밀었다. 목욕탕 의자에 걸터앉아 공상에 잠기는 건 마치 기도와 유사한 행위로 생각을 정리하는데 그만이다. 따땃한 탕의 온도로 몸과 마음이 편해져 한주를 버틸 힘이 생긴다. (탕 안에서는 상태가 좋지 않은 목과 허리를 잊을 수 있다. 목욕을 마치고 마시는 바나나우유의 맛은 보너스)
항상 좋은 목욕탕에 가고 싶었다. 학교 근처에 생긴 큰 찜질방도 대전에서 잠깐 들른 유성온천도 성에 차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목욕탕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물의 유황 함량이 많아야 한다. 탕에서 막 나왔을 때 팔을 만졌을 때 느끼는 미끈미끈함.
두 번째 시설이 적당히 촌스럽고 시간의 흔적이 쌓여야 한다. 힙과 목욕탕은 상극이다.
세 번째 노천탕이 있어야 한다. 얼굴은 바람을 느끼고 몸은 뜨거운 탕에 담그는 현실 바깥 어딘가에 있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
마지막으로 모두들 진지하고 즐겁게 목욕을 즐기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도서관에서 공부가 잘되는 이유는 모두 책에 집중하는 무드가 한몫하듯 말이다.
2016년 11월 일본 오사카에서 갔던 목욕탕은 좋은 목욕탕이었다. 2곳 모두 오사카 주유패스를 끊으면 이용할 수 있는 곳이라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일본 목욕탕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은 있었지만 싼 게 비지떡이란 속담이 자꾸 생각났다.
스파 스미노에
일요일 오후 덴노지 동물원을 구경하고 스파 스미노에로 향했다.
스파 스미노에 입구엔 목욕을 끝낸 사람들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딱 기분 좋은 북적거림에 수건 대여료를 내고 입장했다. 욕탕엔 관광객과 일본 사람들이 섞여 있는데 활기와 차분한 느낌이 공존했다.
목욕탕은 내게 사회적 공간인 동시에 극도로 개인적인 공간이다. 혼자 목욕탕에 가면 안경을 벗으니 시야가 흐릿하다. 타인에 신경 쓸 일 없다. 몸에 비누칠을 하는 것과 때를 미는 것 모두 나 혼자서 나를 위해 하는 일이다. 주변의 언어와 표정에 집중했던 레이더를 끄고 내 속으로 침잠할 수 있다.
가끔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아이들이 내지르는 소리와 아저씨들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고함(왜 운동을 욕탕에서 하는지)과 등 밀어 달라는 아저씨의 요청. 스파 스미노에에서도 이런저런 소리들이 있었지만 외국어라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씻는 장소마다 약간의 칸막이가 있는 것도 꽤 도움이 되었다. 대중탕에서 생각의 벽을 차분히 쌓는 시간은 반갑고 행복했다.
탕은 크게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한증막에서 TV를 보며 땀을 빼고 노천탕으로 나왔을 때의 상쾌함은 아직 기억이 난다. 처음엔 실외에서 벗고 있는 게 어색해 쭈뼛쭈뼛 주변을 신경 썼다면 나중엔 밤하늘을 보며 오늘 저녁은 뭘 먹지 생각하며 여자 친구는 어떤 표정으로 이곳을 즐기고 있을지 상상해봤다.
미끈거리는 온천수에 기분 좋은 노천탕 속에서 사색에 잠기는 기쁨이란. 그동안 좋은 목욕탕을 찾았던 내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장소에서 금광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마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글래스톤베리나 유서 깊은 음반가게에 가고 싶은 것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작가의 흔적을 찾는 여행을 계획하듯 나도 본격적인 온천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탕에서 나와 몸을 닦고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볼이 발그레 져서 하루 종일 걸었더니 발도 아프고 그랬는데 뜨거운 물에 들어가니 피로도 풀리고 몸이 노곤해지는 게 최고라고 했다. 친구는 목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렇게 좋았나. 친구는 계속 신나 하며 탕에서 꿀을 나눠주는데 자기도 받았느니 말하는데 난 그걸 능가하는 에피소드를 찾을 수 없었다. 응응 하면서 걸어가니 황량한 분위기의 경륜장이 보였다. 저 경륜장도 지금은 조용해도 막 북적거리며 떠들 때가 있었겠지. 근처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전철역으로 갔다. 배가 많이 고팠다.
나니와 노유
누군가 방콕에 가서 1일 1 마사지를 받았다고 자랑했다면 우리는 오사카에서 1일 1 목욕탕에 갔다. 둘째 날 갔던 나니와 노유 또한 오사카 주유패스를 끊으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날은 하루 종일 비가 조금씩 내리다 그치다를 반복했는데 밤에는 본격적으로 비가 내렸다. 친구와 우산을 함께 쓰고 골목을 걸었다.
고층 빌딩에 위치한 나니와 노유는 접근성이 좋아서 그런지 한국 관광객들 숫자가 많았다. 스파 스미노에보다 시끌벅적했고 어제 느낀 처음이란 기쁨은 다소 반감됐지만 노천의 1인 탕에서 비를 맞을 때의 기쁨은 뭐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어릴 때 가장 좋아한 책 중 하나는 모험도감이다. 영향을 많이 받은 책인데 캠핑에서 비를 만나면 옷을 벗고 흠뻑 맞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라는 부분이 있다. 그걸 꼭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산성비와 건강염려증이 합쳐져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맨몸으로 비를 맞고 탕에 들어가는 건 (모험도감을 읽던) 추억을 소환하는 동시에 현재의 추억을 차곡차곡 쌓는 시간이었다. 몸을 씻고 다시 우산을 쓰고 친구와 전철역으로 걷는 발걸음은 만족감과 개운함으로 몹시 가벼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함께 걷는 걸 좋아한다. 느린 속도로 걸으며 의외의 발견에 기뻐한다. 일본에서의 온천 또한 의외의 기쁨이었다. 지금도 주일마다 동네 목욕탕에 간다. 별 것 없고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짜증 나지만 사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마음속 한 구석에 간직한 좋은 목욕탕에서 가진 시간을 떠올리며 언젠간 또 좋은 목욕탕에 갈 것을 믿는다. ‘시시한 걸 경험해야 좋은 걸 진짜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