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r - the best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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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r의 the best of는 그들의 6번째 앨범 13이 발매된 후 2년쯤 지나 발표한 베스트 앨범이다.
줄리언 오피의 감각적인 커버 아트웍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제는 지나치게 소비된 탓에 조금 지겹기도 하지만 그때는 뭐 이렇게 귀엽고 상큼한 그림이 있나 했다.)
사람들은 oasis와 blur를 비교하곤 했는데 둘의 재능은 너무나 다른 영역에 속한다. 다르기에 비교하고 싶은 심리는 십분 이해하나 blur의 앨범 중 가장 힘이 빠진 the great escape와 oasis의 앨범 중 가장 기세 등등했던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를 비교하는 건 무척 악의적인 일이라 느꼈다.
두 밴드 모두 좋아했지만 blur가 좀 더 나랑 비슷한 사람 같았다. 영국 사회의 단면을 꿰뚫는 가사와 진지한 태도 때문일까. 그들의 음악은 마치 좋아하는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기쁨을 주었다.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무척 좋아했었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천재소년의 몰락은 늘 나를 잡아끌었다. blur의 진중한 발라드 'This is a low'나 허무가 절절한 로파이 트랙 'death of a party'는 사춘기 소년의 급강하하는 감정과 딱 들어맞는 노래였다.
사실 베스트 앨범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밴드가 나타내려는 생각의 완결판이 정규 앨범이라 믿기에 베스트 앨범은 짜깁기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blur의 베스트 앨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베스트 앨범을 산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앨범은 샀다. 그 이유는...
1. blur 음악에 대한 갈증 (당시 가지고 있던 blur 앨범은 셀프 타이틀 앨범과 parklife가 전부였다. 노래는 듣고 싶은데 앨범 살 돈은 부족했다.)
2. 앨범 커버가 예뻤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앨범 커버는 집에 있는 앨범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3. 라이브 앨범을 한 장 끼워줬다. (수입음반으로 사서 그럴까. 리미티드 에디션이었나 보다.)
4. 유일한 신곡 'music is my radar'는 이전까지 다른 경쾌하고 스트레이트한 blur의 면모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흥미로운 시도라 느꼈다.
앞에서 기술한 이런 이유 때문에 평소의 신념을 거스르고 샀던 베스트 앨범이지만 이 앨범은 산 이후에 더 좋아진 앨범이다. 모든 곡이 훌륭하다. beetlebum에서 시작해 감미로운 곡은 달콤하고 신나고 충만한 곡에선 100% 충실하게 논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모든 곡이 훌륭한 점이 흠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어떤 앨범의 경우 명곡 앞 뒤 곡은 지극히 평범해, 명곡의 비범함을 배가시킨다. 그러나 이 앨범은 한 곡도 배경 역할을 할 만한 곡이 없다. 마치 고속도로에선 모두 빨리 달려 내 차도 천천히 달리는 것처럼, 앨범 전체로 들을 때 갑자기 좋아서 흥분하는 지점이 없다는 점, 이게 흠이라면 흠이 될 수도 있겠다. (그만큼 흠이 없는 앨범이다.)
내 ID는 blur365다. 한창 blur를 좋아할 때 365일 blur를 듣겠다고 지은 ID가 되겠다. 열렬했던 blur 빠심은 7번째 앨범인 think tank를 절정으로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마지막으로 발표한 the magic whip의 경우 처음엔 크게 매력을 느낄 수 없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신인 밴드의 훌륭한 앨범보다 사랑하는 밴드의 조금 이상한 신보에 더 맘이 가는 법, 어떻게든 좋아해 보려 노력하니 예전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란 시구가 생각난다. ㅎ) 예전처럼은 아니라도 여전히 좋아하는 밴드 중 하나엔 blur가 있다.
글을 쓰며 오랜만에 blur 베스트 앨범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몇 명의 사람에게 혹시 blur를 좋아하냐고 물어봤다. 그들의 대답은 시원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만약 누가 내게 blur를 좋아하냐고 물었다면 얼마나 신나 했을까. 참 할 말이 많았을 텐데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난 blur의 음악과 가사처럼 이 세계를 관찰하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정말이지 어릴 때 접한 음악이며 책은 중요하다고 느낀다. 만약 blur가 아닌 다른 밴드에 빠졌으면 어떻게 됐을까. 판테라나 후티 앤 더 블로피쉬 같은 밴드? 음...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