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시간 #3

- 직장인 A 씨가 연차를 낸 날

by moment books

#1

직장인 A 씨는 오늘 오랜만에 회사 연차를 내고 광화문 일대에 있는 다양한 미술관과 갤러리들을 방문해 보기로 결심했다. 아직 미술이나 여타 예술과 관련된 분야에 조예가 깊지 못한 A 씨였다. 큰 규모의 박물관에 있는 상설전시회는 무척 지루하고 단조롭다고 느껴서 유명한 외국 작가들과 거장들의 그림을 전시하는 기획전시회만 줄곧 다녔던 A 씨는 경복궁 옆에 이렇게도 많은 크고 작은 갤러리들이 있는 줄도 몰랐다. 소소하지만 개성 있는 컬렉션들을 자신의 기호에 맞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여겨졌다. A 씨는 아프리카 박물관이라고 적혀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2천원으로 작은 전시관 내부를 감상했다. 평소에 전혀 관심도 없었던주제였지만, 그래도 삼십 분간 알지 못했던 분야에 대한 체험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어서 매우 경제적이고 유익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관람을 마치고 A씨는 <차가 없는 거리>라고 명시되어 있는 인사동에서 삼청동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봤다. 차가 전혀 다니지 않는 길인 중 알았는데 5분 동안에만 차가 두 대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굉장히 놀라버린 A 씨. 뒤늦게야 이곳은 주말과 공휴일에만 ‘차가 없는 거리’로 운영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합리적이군, 합리적이야.’ A 씨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그리고 사람은 별로 없는 '차가 없는 거리'를 여러 자동차와 함께 사이좋게 걸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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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미세먼지 농도가 ‘나쁨’인 날이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점심이 지나고 나서부터 목이 약간 칼칼한 것이, 분명히 요 몇 시간 동안 많은 미세먼지를 들이마신 것이 분명하다고 A 씨는 생각했다. 순전히 느낌만 그런 것이겠지만, 차가운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상당 부분 이 먼지들이 목에서 씻겨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가까운 카페를 찾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국내 최대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었다. 맛에 대한 평가를 하기에 앞서 가장 익숙하고 어느정도 ‘검증된’ 카페이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 없이 그곳에 들어가서 커피를 주문했다. 연차를 낸 날에 이렇게 한가로이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자신의 현재의 모습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A 씨였다.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진 A 씨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직장 상사가 업무와 관련된 지시를 메시지로 보낸 것이다. 표면적인 지시 사항은 '내일 출근해서 이러이러한 일들을 처리해 놓으라'라는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당장 오늘 저녁에는 착수해야 내일 마무리를 지을 수 있는 종류의 일을 지시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마음이 조급해진 A 씨는 조금만 삼청동을 더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삼청공원까지 걸어갔다가 건너편 길로 다시 내려와서 귀가하기로 마음먹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화장품 가게들이 보였다. 연예인의 얼굴이 걸려있는 판넬이 보였다. 중간중간 빈티지 샵이나 작은 악세사리 상점들도 보였지만, 이제는 천호대로 앞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점포들이 늘어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삼청동을 빠져나온 A 씨는 광화문 역을 통해 집으로 귀가하고자 결심했다. 광화문 역으로 가는 길에 경복궁 성벽과 마주하여 수십 대의 관광 버스가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수많은 중국인들이 관광을 마치고 차에 몰려들고 있었다. A 씨는 본래 자신이 걸었던 반대편 길을 통해 광화문 역으로 향했다. 네 시간 동안의 활동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목이 조금 더 칼칼해진 느낌이었다.


#2

좋아하는 거리는 한 달에도 몇 번이고 찾아가는 나로서는, 삼첨동과 그 주변거리를 특별히 좋아해서 수도 없이 걸어다녔다. 아내와 연애 시절부터 찾게 된 삼청동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 준 서울 안의 독립적인 공간이자 주거지 근처에 체험할 수 없는 경험을 안겨다 주는 특색있는 공간으로 느껴졌다. 이런 비슷한 느낌을 이후에 환기 미술관을 찾아가게 되면서 부암동을 통해서 느끼게 되었고, 연남동이나 효자동을 통해서도 비슷하게나마 경험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서울 안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훌륭한 공간을 찾아나서는 것이 하나의 큰 즐거움이자 삶의 소소한 행복이 된 시기가 있었다.


이제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아직 부암동과 삼청동, 그리고 결혼식을 올린 주교좌 성당 주변 등의 공간들은 아련하고도 즐거운 추억을 언제나 떠올려 주는 역할을 하지만, 그렇게 많이 사랑했던 공간들 중 많은 곳들이 서서히 예전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했던 공간들이 망할 대기업 화장품, 커피, 외식 프랜차이즈에 의해 점령당하는 비참한 경험을 끝없이 이어가고 있다. 단순한 상징으로서 이것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본의 이동과 점령,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의 흐름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들은 아이가 커서 점점 부모의 모습을 닮아가듯이, 서로 동질적인 유전자, 즉 '특색 없는 서울'이라는 유전자를 지닌 존재처럼 결국에는 점점 거의 비슷해져간다. 얼마 남지 않은 작은 소품점이나 갤러리들이 더 이상 문을 닫지 않았으면 바람으로 가끔씩 이곳들을 확인차 들러보는 궁상 맞은 행동은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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