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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ent books Oct 29. 2018

숲길 2.

10월의 공기.

그 숲길에 혼자 있고 싶었다.


가족과 함께 용산가족공원을 들린 날이었다. 

올림픽공원이 서울 최고의, 아니, 대한민국 최고의 공원이라는 신앙이 확고히 자리잡은 나에게,

가보지 않은 공원을 가보는 행위는 주로 지금 가려는 새 공원과 올림픽공원을 비교함으로써, 

내가 사랑하는 그 공원이 가장 뛰어난 공원임을 애써 재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한심한 생각을 어느정도는 가지고 지하철 이촌역에 도착했다.

박물관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용산가족공원 쪽을 향했다.

아내는 장모님(앞으로 어머님이라고 부르겠다)과 함께 따로 움직이고 있었고,

나는 지금 준비하고 있는 시험공부도 있고 해서 이리저리 전국에서 수집해서 야외에 전시해 놓은 석탑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걸어가다 보니 금세 공원쪽으로 향하는 좁은 길이 나타났다. 

두세 군데 정도 다른 루트로 나눠지다가 다시 공원쪽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로 합쳐지는 짧은 구간의 숲길이었다.

사실 숲길이라 하기도 애매할 것이다. 

아주 인공적으로 조성된, 공원과 박물관 단지 사이의 다리역할을 하는 그런 기능 정도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결코 폭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규모도 아니지만 '미르폭포'라고 명명한 공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순간 혼자 우두커니 있었는데, 뒤쪽으로 나 있는 길이 보였다.

그 길에 들어서니 말도 안 되게 눈부신 햇살이 전신을 감쌌던 것이다. 


여기는 그야말로 시민의식이 특별히 부족한 아저씨들이 '길빵'하면서 내뿜는 연기를 들이마실 일도 없고, 

시끄러운 우리 어린 친구들이나 방정맞은 강아지(특히 푸들이나 요크셔테리어 같은 종을 말하는 것이다)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없고,

외부 스피커를 틀어놓고 레이서처럼 달리고 있는 망할놈의 바이커족 하나 없는,  

정말로 늦가을의 바람과 따스한 햇살만이 가득한 어떤 특정한 시공간이 연출된 것이다. 


유난히도 사람 없고 한적한 곳, 마치 프루스트가 묘사한 나른한 일요일 오후 한 때와 같은 공간을 좋아하는 나에게 바로 이런 공간이 절실하곤 하다.

비록 5분밖에 그곳에 머물지 못했지만(아내가 분위기 잡고 있지 말고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특정 분위기와 이미지, 옛 기억들을 동시적으로 많이 상키시킬 수 있었다. 


작은 소도시 여행지, 대학시절, 그리운 사람들, 공원에서 사색할 때의 기분,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을 때의 느낌, 미국생활 등..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잠시나마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는 생각들이 스쳐지나간다. 

10월의 공기는, 도대체간에 무엇이 그리 특별하길래 특정 시공간의 조합과 함께 마법같은 기억의 회상과 생각의 환기를 이렇게나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인지!


공원에서도 우리 가족은 한동안 머물며 한가로운 한 때를 보냈다. 

미군들이 많이 살아서인가(아저씨같은 소리처럼 들린다) 외국 아이들도 많이 보여서 괜히 이국적인 느낌이 났던 점특이했다. 


이제 이 모든 즐거운 기억들을 뒤로 하고 집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 


다시금 그 숲길을 지나서 지하철역 쪽을 향해 걸었다.

이제 다시금 무진장 걸어가서 군중 사이를 헤쳐나가 두 번의 환승행위를 거쳐 집에 갈 일만 남았다. 

누군가 제안을 했다(아내였을 것이다. 아니면 내 마음속에서 10월의 바람처럼 살며시 빠져나온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택시를 타고 가자고. 

결국 택시를 타고 집으로 들어오는, 경제적으로는 분명한 손해이지만 모두가 행복할 수 있었던 결정을 내렸다. 


역시 좋은 숲길을 지나니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일에도 거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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