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알고 있는 곳

Brick 1. 아지트

by moment books

Brick 1. 아지트



나만 알고 있는 곳


나는 이제 청년 시기의 끝자락에 있다. 그러나 여전히 어렸을 적 특성들을 완전히 습관에서 떨쳐내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어른들 눈을 피해서 나 혼자, 혹은 가까운 친구들 몇몇만 알고 사용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찾았다. 그곳에서 우리만의 작당모의를 은밀히 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지금도 나는 그런 공간들을 확보해보는 일에 관심이 많다. 현실적으로 어떤 공간을 나만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소리 없는 작전회의가 머릿속에서 진행된다.


어릴 적 나만의 공간은 그리 거창한 곳이 아니었다. 사실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은밀하지도 못했다. 집 주변 공터의 나무 밑이나, 교회 창고가 될 수 있었다. 이 공간은 나의 결심, 혹은 몇몇의 합의 가운데 지정한 어떤 장소에 모여 무언가 일을 꾸민다는 의미만 확인할 수 있으면 만들어질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았던 장소 중에 공사장 근처에서 볼 수 있는 기다란 기둥 콘크리트가 쌓여 있는 곳이 있었다. 폐수배출 용도로 사용된, 가운데 공간이 비어있는 콘크리트 원형 기둥으로 기억한다. 이곳이 내 기억 속 첫 번째 ‘우리들만의 공간’이자 아지트였다.


이때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어린아이들이 드나들며 뛰어놀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다소간 위험할 수 있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곳에서 놀았다. 당시에도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 크고 길쭉한 콘크리트 기둥을 볼 때마다 탐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길가에서 끝과 끝을 이어 기다랗게 늘어져 있는 그 모습이 빚어내는 독특한 모양새,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들어가서 놀 수 있다는 쓰임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콘크리트 구조물의 가운데가 비어있다는 특성이 우리에게 가장 매력적인 요소로 다가왔다. 정말로 그 안은 매끄럽고 깨끗하게 뚫려 있었다. 미취학 어린이들 정도의 크기이면 충분히 드나들면서 기어 다니기에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었다. 어른들이라면, 길을 가다가 굳이 그 공간을 들여다보거나 한번 들어가 보는 시도를 할 리 없을 것이다. 외부로부터 단절된 공간에 넓은 공간이, 아니 하나의 도로 길이만큼이나 기다랗게 확보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곳이 우리들의 아지트가 되기에 충분했다. 누구의 소유가 돌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지만, 그 콘크리트 공사가 들어가기 전까지는 완전히 우리가 점유한 공간이 돼 버렸다.






아지트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가능했다. 우선 나만의 시간을 갖는 기능이 있었다. 기분에 따라 나는 그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보통은 기분이 울적하거나 좋지 못한 일이 있을 때 그곳을 찾았다. 뻥 뚫려 있는 콘크리트 터널의 중간에 위치하여 혼자만 조용히 앉아 있을 때, 그때만큼은 그곳이 나만의 공간이자 내가 점유한 독립적인 공간이 될 수 있었다.


친구들과는 주로 어떤 규칙을 정해서 하는 술래잡기와 같은 놀이를 즐겼다. 기다란 콘크리트 구조물 내부를 기어 다니면서 추격과 탈출 놀이를 하는 것은 재밌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어린이들의 전형적인 놀이를 하는 것만으로 오후의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간혹 어떤 기둥에서 다른 기둥 사이의 통로가 조금 어긋나게 위아래가 연결되어 있는 적이 있었다. 이때 급하게 다른 기둥으로 건너가느라 천장의 높낮이가 달라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머리 높이를 그대로 유지하고 통과하느라 머리를 천장에 부딪칠 때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번갯불이 번쩍하더니, 이내 그 부위에 커다란 혹이 달렸다. 그 주변 공사가 들어가기 전, 그러니까 우리의 훌륭한 놀잇거리가 사라지기 전까지 그곳에서 몇 번이나 그런 불행한 혹을 달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조금 더 아이들답고, 덜 위험한 아지트도 있었다. 친구네 빌라 단지 근처에 있는 공터였다. 그 공터는 길가에 면한 곳이 아니어서 자동차에 부딪힐 위험이 없었다. 또 겹겹이 서 있는 빌라 건물들의 끝자락 가장 깊은 공간에 위치해 있기에 주민들의 왕래만 있는 조용하고 안전한 공터였다. 내 친구와 나는 그곳의 매력에 금세 빠져들었다. 어른들이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잘 오지 않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동네 빌라 내부 깊숙이 있는 곳이라 학교 뒤편이나 음침한 골목길처럼 동네 무서운 형들이 그들만의 역할을 위해 매일같이 방문할만한 장소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이곳은 주변이 벽으로 쳐져 있어서 길가와 완벽한 단절이 보장되었으면서도 어둡거나 음침한 공간이 아니었다. 정확히 남향으로 난 공터였기에 밝은 햇살이 오후 내내 따뜻하게 내리비치는 공간이었다. 나와 친구는 우리만의 따뜻한 오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곳을 아지트로 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선 종이박스를 길거리에서 주워 와서 작은 직사각형 공간의 뼈대를 만들었다. 몸을 지지하거나 무게가 나가는 물건을 기대어 놓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외부로부터 구분된 공간의 형태를 갖추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렇게 뼈대를 만들고 우리만의 브릭을 만드는 역할은 친구가 잘 하는 일이었다. 이리저리 대략적인 직사각형 형태의 종이 벽체로 제단해서 세우고 테이프 같은 것으로 연결을 하더니, 어느새 그럴싸한 직사각형 공간이 공터 위에 세워졌고 그 안으로 들락날락할 수 있게 되었다.


신문지도 많이 쓰였다. 주로 박스들 사이사이 틈새를 막는 용도였고, 필요시에는 박스 대체용으로 벽체로도 사용됐다. 더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려고 했다면 아마 짚이나 천 같은 것을 가지고 와서 아지트를 더 꾸며봤을 텐데, 그렇게까지 섬세한 작업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우리가 가끔씩 들려서 몸을 그 공간에 넣어 외부로부터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충족될 정도, 단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우리의 아지트에서는 소박하고 은밀한 행위들이 이뤄졌다. 집에서 보기 힘들었던 만화책을 본다든지, 아니면 잡다한 놀이용 물건들을 모아둔다는지 하는 정도였다. 고무줄 총, 딱지 같은 것들 말이다.


다른 어떤 기능보다도 중요한 의미는 이것이다.



우리가 집을 나와 어딘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것이 어린 시절 우리가 생각한 가장 순수한 의도에서 만든 아지트의 목적성에 부합하는 의미였다. 기껏해야 더러운 흙 위에 박스로 세운 초라한 집에 들어가 노닥거리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 어린 시절에도 나만의 공간을 갖는 것이 그렇게도 의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브릭 1. 아지트.jpg <원본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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