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ck 1. 아지트
Brick 1. 아지트
아지트의 독특한 감수성을 기억하고 있는 우리네 또래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된 그들이 지금도 자기만의 공간을 바라는 이유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다운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이가 적고 많고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분신’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하나의 주체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OO가 나의 분신이다.’, ‘나의 분신 같은 존재’와 같은 말을 사용한다. 분신은 자신을 대체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 되기도 하고, 나의 팔다리처럼 어떤 일을 충실히 해내는 물리적 도구를 두고 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아지트는 바로 분신이 공간화된 개념이다. 아지트는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의 캐릭터가 그대로 이식된 공간이다. 그 공간은 전적으로 그 사람을 닮았다. 그 공간의 기능이 분신의 기능과 동일하다. 그 공간은 특정 환경 속 한 인물이 어떤 목적성을 위해 임의로 구성하거나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탄생한다. 그 공간은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방이 될 수도 있고, 실험실, 차고, 다락방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자주 가는 영화관, 카페, 미술관처럼 공공의 공간일 수도 있다.
그 공간들이 아지트가 되는 사건은, 철저히 인식의 주체가 그 공간을 그렇게 인식했을 때 일어난다. 최소한 한 사람 이상이 어떤 공간에 대해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개인적인 목적성에 따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이 될 때 아지트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외형적으로도 그 아지트는 그 사람의 분신처럼 많은 특질을 그대로 반영하여 만들어진다. 그 아지트를 사용하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위해 필요한 각종 물품을 그 공간에 가져다 놓을 것이다. 목적성에 따라 공간의 구획짓기와 놓아두는 물건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아지트의 모습도 달라진다.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아지트도 자기만의 옷을 입는다. 방문을 들어서는 순간 그 사람은 그 아지트 주인의 분신을 만나는 것이다.
본래 아지트의 사전적인 의미는 정치적 차원에서 생겨난 것이다. 지하운동을 위한 집합소나 근거지 같은 공간 말이다. 이런 점에서 아지트는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외부의 눈을 피해서 특정 행위를 도모하는 공간”으로 그 공간적 특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식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아지트는 한 개인 혹은 집단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삶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것과 타인들은 모르게 은밀하고 치밀하게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아지트에 대한 이런 정의 내리기 작업만 해서도 나는 벌써 하나의 아지트를 확보하여 그곳에서 은밀한 나의 계획을 꾸미고 실행에 옮길 준비를 하는 듯 흥분된다. 내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공간이었다. 숨막히는 일상에서 잠시간 나와서 내 기호와 생계와 상관없는 아주 비생산적인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곳.
삶에 대한 가장 순수한 사유와 잉여적 시간을 갖는 곳.
‘삶의 의미없음’이라는 권태로움에 빠지지 않고 존재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
부쩍 요즘 자기만의 방의 필요성을 느낀다. 지금의 우리 집은 작은 방 두 개에, 그보다 더 작은 거실이 딸린 정말 작은 빌라 집이다. 방 하나는 부부의 침실이고, 다른 방 하나는 부부의 작업실이다. 이 작업실에서 우리는 프리랜서 작업을 하든, 글을 쓰든, 아니면 영화와 드라마를 보든 온갖 종류의 생활을 영위한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손님이 오면 응대를 하는 공간으로도 쓰인다. 거실, 응접실, 작업실, 공부방 등의 기능이 하나의 작은 방 안에 모두 응축되어 있는 셈이다.
부부라는 존재는 같이 즐거운 기분으로 작업을 하거나 영상을 시청하면서 행복한 가정에서의 생활을 보내기도 하지만, 작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살다 보면 항상 행복한 일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서로 간의 침묵이 필요할 때, 가벼운 다툼으로 같은 자리에 머물러서 각자의 일을 하기 어색할 때에는 아무래도 각자 독립된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어찌 됐든 방이 두 개가 있는데 거기에서 또 다른 방 하나를 고집하는 것은 지금 형편에서 조금 억지스러운 일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한데 정말 그 작은 방 하나는 너무나 소박한지라, 차마 “우리 집은 방이 두 개나 있다”라고 말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하나의 방을 온전히 침대방으로 할애하고 나면, 이 방 하나에 모든 나머지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춰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에 큰 책상 두 개를 집어 넣고 각자의 영역을 나눠 일하고 있는 형편이니, 그밖에 다른 쓰임새를 충족시키려는 시도는 사실상 어림도 없는 상황이다.
사실 이곳으로 처음 이사했을 때 각 방의 기능을 정할 때에는, 각각 한 명씩 방 하나씩을 가져가는 것으로 정했었다. 독립성이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한 우리 부부는 각각의 방을 가져가고 한 방에는 침대를, 다른 한 방에는 책장을 넣는 것으로 공간적 활용의 타협을 하고 그 계획대로 방을 꾸며 보았다. 한 명의 방에는 침대가 있어서 누군가 잠을 청할 때에는 다른 한 명이 불가피하게 불을 켜고 소음을 발생시키며 작업하는 것을 중단하는 양보가 필요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각각의 독립성을 보장한다는 목적성을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 될 것 같았다(물론 내 방이 침실이 되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각자의 방이 생기고 독립된 작업이 가능한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었다.
비극은 방 하나의 길이가 예상보다 너무 좁다는 사실에서 시작되었다. 침대를 배치해 보니, 맞은편에 책상을 배치하고 의자를 자유롭게 이동할 만한 공간이 확보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사전에 치수를 재보고 시도한 배치였다. 그러나 의자를 얼마만큼 뺄 수 있어야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이 가능할지에 대한 고려를 놓친 것이다. 나는 마치 중세시대에 활발한 이교도 활동을 하다 붙잡혀서, 가장 잔인하게 고문받기 위해 준비된 쇠바늘이 있는 관 안으로 들어가 앞뒤로 꼼짝도 못하고 묶여버린 불행한 죄수가 쓸 수 있었던 만큼의 영역만을 쓰게 되었다. 책상과 침대 사이에 인간성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틈도 없이 낀 꼴이 된 것이다. 그 공간에서 일어나서 탈출하여 내 인간성을 증명하려면 의자를 이리저리 몇 차례 후진과 전진, 비틀기를 반복하는 비참한 수고스러움을 감당해야 하는 처지였다.
결국에는 모두의 작업 책상을 하나의 방에 몰아서 배치하는 방법을 택했다. 원래의 침실에는 책상을 대체하여 책장이 들어가고, 그 밖에 옷장 등의 가구들이 들어감으로써 안정적이고 평범한 침실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여기서 잃어버린 것은 오직 나를 위한 공간이었다. 나에게 '아지트'가 없다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