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ck 2. 강의실
강의실은 흰색 스케치북인 줄 알았는데, 사실 많은 똑같은 내용을 쓰고 지워내서 그리 새로울 것이 없는 재생지에 더욱 가까웠다. 이 재생지가 새로워지려면, 그 안에 작성해야 할 내용이 어떠한가가 중요하다. 종이에 내용을 채워 재생지의 기능을 새롭게 하는 것을 결국 그것을 손에 쥔 사람의 몫이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경험하는 일은 논문의 ‘Abstract’(논문 초록) 항목을 읽는 것과 같다. 우리 훌륭하신 교수님들은 연구한 대상에 대한 기본 지식과 커리큘럼상 다루어야 할 내용의 핵심적인 내용만 축약해서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전달한다. 학점만 잘 받길 원하는 학생이라면, 강의실 수업과 교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그리고 교수가 강조하는 내용에 대한 추가학습 정도만 하면 충분할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개인의 선택이자 몫이다. 같은 재생지라도, 헤밍웨이나 피카소가 펜으로 슥슥 끄적였던 몰스킨 노트만큼 값어치 있는 무언가가 되려면 학생의 선택이 중요할 것이다. 학교의 시스템으로 봤을 때는 크게 의미 없는 행동이겠지만, 개인에게 있어서는 의미 있을 일이 여기서 시작된다. ‘잉여적인 공부’, 그것이 필요하다.
대학 때 느꼈던 강의의 권태로움은, 위에서 설명한 거창한 사회학적 분석 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그 강의 시간에서 일어나는 작은 부조리들에 의한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3학점짜리 수업 같은 경우 어떤 경우에 세 시간을 연속으로 스케줄을 짜서 들어야 하는 수업이 있었다. 자신의 생활 리듬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학과 전체 시간표상 충돌을 피하기 위함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와 같은 폭력을 행사하신 한 교수님이 떠오른다. 오후 4시에서 7시까지 세 시간 연속 수업을 짜 놓으신 어떤 교수님 말이다. 그분의 강의 전체 중 절반은 허기와 피곤함에 허덕이다 끝마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엇보다 그날은 내겐 과외를 하러 가야 하는 날이었기에 훨씬 더 높은 강도의 괴로움으로 다가왔던 기억으로 남는다.
아침 강의 때 유난히 지루했던 강의를 진행하신 교수님 한 분도 떠오른다. 한 200명 가까이가 동시에 듣는 대형 강의였는데, 이 강의는 교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번역한 교제를 거의 있는 그대로 줄줄 읽고 끝내는 수업으로 유명했다.
그 지루함의 정도를 말하자면, 어느 일요일 오후의 나른한 목사님의 설교나 땡볕에 운동장에서 듣는 교장 선생님의 훈시 정도는 유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강의를 어떻게든 맥을 놓치지 않고 좇으며 노트에 필기를 열심히 하며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하는 학생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거기서 희극적인 인생의 단면을 느끼는 것이 이 강의의 유일한 낙이었다.
강의 자체를 통해서 어떤 주제와 관련한 내용 전부를 다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고, 또 그 강의에서 나오는 얘기가 전부이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강의 시간 자체는 지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 형식만 남은 일종의 세레모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학점을 잘 받는 매커니즘이 중요해진 학과 일정에서, 강의는 오전 9시, 정오, 오후 6시 시간에 맞춰서 나와 드리는 미사같은 것으로 되어 버렸다. 물론 미사만큼의 경건성은 떨어진다. 강의실의 의식은, 어떻게든 남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경쟁의식에 사로잡힌 승냥이들이 말쑥한 가면을 쓰고 나와 협력적인 척하는 기만적인 영혼들이 모인 조금 더 불경한 곳이라는 점에서 미사와 다르다.
나도 대학 생활 시작 후 금세 권태로움에 빠져들었다. 그 교수님들이 덜 훌륭한 분들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기본적으로 학부에서의 강의는 관습적으로 이어져 온 교수들의 강의 스타일에 따라 진행되는 쇼와 같다. 마치 시스템화된 프로그램에 접속해서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가장 큰 효율성을 보장한다는 공식 같은 것이 증명되어서, 그대로 따라서 웃고 울어야 하는 스탠딩 쇼처럼 느껴졌다.
강의실은 ‘재생지’일지언정, 만듦이 종료된 책이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강의실이라는 브릭은 도대체 왜 설렘과 기대감이 사라진 장소가 되었을까. 왜 더 이상 새로운 가능성을 내포한 공간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일까. 강의실이라는 공간은 비싼 시장가에 의해 조성되어 상품을 제공하는 사람과 사는 사람까지 갖춰졌지만, 실상 시장의 논리처럼 효율적인 가치교환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곳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수동적이고 관습적 수업 시스템에 매몰되어 가장 익숙한 형태대로 강의를 주고받는 행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강의실에서 벗어나, 자신이 직접 자료를 찾아보고 고민하고 직접 글이나 말로 풀이해보는 과정이 뒷받침되어야 의미라는 것이 생겨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에서 얻는 의미라는 것은 단순히 학점이 보장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이 학생이 사회에서 ‘고독한 단독자’가 되었을 때, 그리고 스스로 배운 것을 자신의 전문 분야에 제대로 적용시키고자 할 때 필요한 지혜와 지식을 얻어간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대학 생활에서부터 개인의 사유 활동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배우게 된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게 되는지 경험하게 된다. 미숙한 논리적 분석의 틀을 사용하는 것일지라도, 대학 생활 동안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인 사람은 스스로 사회에서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의 기본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강의실에서는 지식의 최전선에서 최신의 학문적 경향과 자신의 전공의 ‘Abstract’을 들고 나온 교수를 만나는 상황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이 사건을 통해, 학생들은 해당 교수와 학문 분과의 학문적인 방향성과 흐름을 읽고,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점수만 챙기는 것이 아닌, 진정한 배움과 학문함의 차원에서 봤을 때 말이다. 학생 스스로 강의실의 권태로움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