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 마지막 브릭
어느 날 비가 몹시도 많이 왔다. 금요일까지 완성해서 보내야 하는 작업을 진행하다가 창밖으로 거센 빗줄기가 내는 소리와 빗줄기에 부딪힌 식물들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운치 있는 풍경에 잠시 빠져들어 한참을 밖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서재로 이동해 몇 가지 서적을 뒤적여 보았다. 최근에 읽고 있던 문학 작품과 미래서 몇 권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에 앉아 몇 구절을 읽다가 중간중간 어떤 내용들이 떠올라 몰스킨에 적어 두었다. 별 큰 의미가 없는 내용도 있었고, 감성적인 생각에 젖어 들어 정성을 들여 작성한 글귀도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달력을 봤는데 벌써 이곳에 온 지 석달가량 되었음을 새삼스레 확인했다. 벌써 그렇게 된 것이다.
나만의 공간은 제법 모양새를 제대로 갖췄다. 2:1 비율의 단순한 형태의 직사각형 단층 벽돌 건축물을 크고 작은 방 6개가 딸린 공간으로 구획짓고, 그 공간들 각각의 목적과 기능에 따라 도장과 공간 컨셉을 부여했다. 다양한 감각기관을 활용하여 그 공간들이 어떤 기능을 하는 공간인지에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각 방의 기능에 맞추어 적재적소에 비치된 물건들은 각 방의 컨셉과 어울릴 수 있도록 준비했고, 방의 쓰임대로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도구들을 채워 넣었다.
그렇게 준비된 방에서, 나만의 공간에서 백일 가까이를 보낸 것이다.
공간이라는 것은 그 공간을 사용하는 주체가 언제나 관여하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 공간은 사용하는 주체가 부재한 상태에서는, 그래서 사용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껏 준비된 모든 작업들, 그리고 거기서의 활동은 언제나 계속되었을 때 그 의미를 유지할 수 있다. 용도에 맞게 사용하지 않는 공간은, 결국 주체의 실존에서 배제될 것이며, 잊혀지고 다른 목적에 의해 불가피한 용도변경의 논의와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그 공간이 맞이할 가장 불행한 순간이다.
하나의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은 그곳을 사용하는 자신의 태도와 마음가짐, 그리고 관리의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모습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만약 내가 만든 이 공간이 ‘자기만의 방’이라는 원래의 목적에 맞게 계속해서 기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항상성. 이 공간이 항상성을 유지하도록 어떤 노력을 하면 될 것인가.
나는 이곳에서 오래지 않아 권태를 다시 느꼈다. 자기만의 공간이 일상에서 사용한 공간과의 차이점을 모호해지고,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집에서, 일터에서 하던 일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관성과 같은 것이다. 물리적으로 다른 공간으로 이탈해도, 몸에 배인 습관은 익숙한 행동을 새 공간에 재생시키고 공간 자체를 전염시킨다. 더하고 제하는 수고스러운 행동을 통해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어느새 더해야 할 것이 없고, 제해야 할 것이 있는 상태로 회귀한다.
이 공간이 원래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결국 다시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갔다. 완전히 새로운 공간에서 이리저리 고민하고 구체적인 건축물로 만들었던 곳이 원래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다. 그것은 결국 주체의 자기인식의 문제로 수렴된다. 잘 만들어진 공간이 항상성 유지를 위해 끊임없는 관리가 필요하듯이, 그 공간의 사용자도 언제나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는 부단한 자기성찰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끔하게 잘 만들어진 편안한 공간은, 바로 그 편리함 때문에 평범한 일상에서의 익숙한 행동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손쉽게 발현될 수 있도록 부추긴다. 주체의 자기인식은 바로 그런 행동이 무의식 중에 이 브릭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피는 작업이다.
‘말끔한 곳’에서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노력이 앞으로 있을 것이다. 나의 목표는 앞으로 열 달이다. 잉여의 시간은 내가 몰입하고자 하는 대상을 위해 확보하는 시간이지, 일상에 대한 추억을 상기시키기 위한 여유 시간인 것이 아니다. 원하는 대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집중력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 그것이 브릭을 만들고자 한 목표이자 반드시 체득해야 할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