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
"우리 모두에겐 똑같은 세상이 주어졌으며 선과 악, 죄악과 순수함이 나란히 손잡고 그 세상을 헤쳐 나간다. 안전하게 살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세상의 반쪽을 외면하는 것은, 구덩이와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땅에서 좀 더 안전하게 걷기 위해 눈을 감는 것과 같다."
-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리아나>(민음사) 중에서
초등학교 3학년일 것이다.
오른쪽 눈 아래에 조그만한 실타래 같은 작고 검은 것이 등장하여, 시야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던 때이다.
일상에서 큰 불편함을 느끼게 만들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삶에서 새로운 사실과 즐거움을 알아가는 데 정신이 없던 시절이다. 강렬한 햇빛을 돋보기로 잘 모아서 비추면 종이도 태울 수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고, 문방구에 천 원만 들고 가도 살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세상에 보이는 물체 그대로를 시지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었고, 보이는 그대로의 것을 새로운 정보로 습득하기에 바쁜 호기심 많은 초등학생의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이 현상의 시작이 앞으로 내 인생에 미칠 영향은 전혀 예상치 못한 채, 나는 눈 속의 실타래의 변화 추이 관찰보다는 그날그날의 잉여 시간에 어떻게 새로운 놀잇거리를 찾아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내가 경험하는 눈의 현상이 뭔가 평범하지 않고 충분히 신경이 쓰일 만한 일임을 인지했던 것 같다. 맑은 날 이 현상의 특이점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눈은 일종의 균형을 찾아가듯, 오른쪽 눈에만 보이던 것이 왼쪽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고(형태와 움직임의 유형은 달랐다), 초점에 따라 시야 앞에서 어른거리는 형태가 사뭇 다이나믹하다고 느낄 정도로 활기찬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이조차 근본적으로 큰 문제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아직은 생활 전반에 있어서 큰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시야를 가리거나 정보를 얻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단지 시야를 지나쳐 움직이는 이 물체가 조금은 징그럽다고 느꼈던 것이고(나는 이것을 병명이 가리키듯 '날파리'로 인식하기보다는, '아메바'에 가깝게 인식했다), 이런 현상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조금 들었을 뿐이었다.
비문증이 내 인생에서 햄릿 3막 1장의 주제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던 시기는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덧 내 시야에는 여러 형상의 부유물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군집을 이루며 각자의 무브먼트를 활발히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형광등을 응시하고 있으면 '전자의 흐름' 같기도 하며, 번쩍이는 올챙이와 같은 모습의 불빛이 눈에서 아른거리는 현상도 더해졌다. 이 모든 현상은 이제 충분히 현저히 내 눈이 결코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방증했고, 나는 생애 처음으로 비문증의 현상으로 안과를 방문했다.
지방 친척의 추천으로 가게 된 종합병원.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눈의 병리학적 상태에 대한 진단 받았다. 결론은 "이상 없음"이지만, 처음으로 눈에 무언가 떠다니는 것이 보이는 현상이 의학적 표현으로 '비문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병리학적으로 "이상 없음"이라 함은, 이 현상 자체가 망막박리나 녹내장 같은 위험한 질병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측면에서의 진단이다. 이러한 위험한 질병이 실제로 있음을, 이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다른 현상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을 때는 병리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반면에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비문증은 여러 가지 이유로 발생할 수 있는 어떤 결과로서의 현상인데, 이것 자체가 눈에 질병을 일으키는 어떤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노화에 의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이 나이에 벌써 눈에 노화가 찾아온다니!). 일단 망막 자체에는 아직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만약에, 망막이 일부 떨어져 나갔다든지 하는 식의 문제가 생겨서 비문증이 심해진 것이라면, 그때에는 비문증이 문제가 아니라 실명이라는 전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병원에서 나와 친척의 차를 타고 시내를 지나치고 있었는데 창밖으로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산동제의 효과 때문에 안 그래도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인 세상이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눈에 확대경을 박아놓고 이리저리 살펴본 탓인지, 아니면 눈병과 관련된 온갖 무서운 새로운 사실들을 듣게 되서인지 왠지 모르게 눈물이 조금 났다. 에반게리온을 이제 막 타게 된 이카리 신지 군 정도의 삶의 무게는 아닐지라도, 같은 나이의 나 또한 비슷한 수준으로 앞으로의 삶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성의 공포를 막역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새로운 경험은 돋보기로 개미를 얼마나 빨리 태울 수 있는지를 실험할 때의 초등학생의 흥미와 신기함과는 거리가 먼,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고 앞으로 빨리 떨쳐내고만 싶은 불쾌한 경험에 불과하다.
내가 이때 배운 삶의 진리란 바로 이것이다. 세상에는 경험하고 싶지 않고 기억에서 떨쳐내고 싶어도 결코 그리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 햄릿처럼 불안한 영혼을 지닌 인간 하나하나가, 세상에는 매운 쓰디쓰고 어둡고 불쾌한 일들이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나고 경험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 사춘기에 접어든 학생치고는 범상치 못하고 매우 불운한 방식으로 이렇게 진리를 향해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 눈을 뜨고 있는 이상, 평생동안 눈 앞에 무엇인가가 아른거리며 눈의 움직임에 따라 시야를 방해하는 '날파리들'을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내 비문증 이야기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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