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시간 #1

by moment books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상대적으로 느낀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이미 잘 밝혀져서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 되었다. 굳이 아인슈타인의 어려운 상대성이론을 거론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사람과 어떤 만남을 가지느냐에 따라 시간의 흐름도 빠르거나 느리게 흘러가는 경험을 충분히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의 상대적인 흐름과 관련해서, 어떤 일에 강렬한 밀도를 지닌 집중력을 보이면서 참여하게 되었을 때 시간이 무척 빨리 지나간다고 느낀다. 반대로 그만큼의 집중력이 필요하지 않은 단조로운 일 속에서는 무척이나 시간은 느리고 지루하게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재미나게도 별로 흥미를 갖지 않는 일에서도, 그리고 별다른 집중력을 보이지 않아도 되는 일상 속에서의 반복되는 일들을 통해서도 시간의 흐름이 굉장히 빠르게 진행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그 빠른 시간의 흐름은 그 일상의 개개의 일들을 경험하고 있을 당시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가 때때로 경험해야 하는 보험 관련 문의전화를 떠올려 보자.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자 상담원의 끊이지 않는 문장으로 이어진 첫번 째 문단이 끝날 때까지 최대한의 인내심과 함께 기다려줄 때를 생각해 보자. 바쁜 업무 중에서 이런 전화의 약 30초간 진행되는 상담원의 형식적인 멘트를 들어주는 것조차 정말로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매주 접해야 하는 주간 회의시간의 형식적인 대화들, 예비군 훈련 때의 연대장 훈시, 학창 시절 때의 교장 선생님의 조회와 같은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자. 그 당시에는 지옥 같은 시간의 느려짐의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조금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시간의 흐름이다. 우리의 도시에서 일어나는 반복되는 일상들의 적분. 즉 각각의 사건들의 총합은 전혀 다른 시간의 체계를 보여준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다 봤을 때 각각의 개별적인 사건들은 너무나 지루하고 단조로운 일들 투성이다. 이것들을 모두 합쳐서 전체의 흐름으로 생각해 보면, 즉 거시적인 시간의 단위인 한 달, 한 해로 환원해서 생각해 보면 과연 우리들의 시간이 풍요롭고 의미있는 사건들의 총합인지 의심스러워진다. 오히려 특색없고 조금의 흥분을 돋우지 못하는 사건들의 총합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무의미한 시간들을 아무리 더해봤자 똑같은 사건의 반복 재생산일 뿐이다. 도시에서 우리는 언제나 똑같은 일들을 반복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은 무척이나 빨리 지나가버린다. 새로운 사건들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렸을 적을 생각해 보자. 어릴 적의 인간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정보들을 마주하기 때문에 언제나 새롭고 의미로 가득 찬 세계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누적해 간다. 방대한의 양의 데이터를 새롭게 조합하고 하나의 논리적인 구조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끊임없이 거처야 하기에 시간은 풍요로워지고 순간순간을 최적화된 형태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러한 뇌의 작용은 점점 무뎌지게 된다. 나를 둘러 싼 세계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체계화된 인식 속에서, 이제는 거의 예측 가능한 사건들과 조우하면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아주 새로운 것들을 경험할 기회가 많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일상의 반복'이라는 개념이 가능해지는 것이고, 그것을 경험할 때부터 우리는 이제 소위 '어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의 모습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지루하고 단조롭고 반복적이어서, 더 이상 우리의 놀라운 장기인 뇌를 전혀 자극하지 못해 무한정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 볼 것이다. 별로 유쾌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다루는 일 자체가 그렇게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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