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벗어나야 하는 것?
어렸을 적에는 뭣도 모르고 펑펑 내리는 눈이 좋았다. 다들 어렸을 적에는 눈이 무척 좋았을 것이다. 눈과 관련된 기억들은 하나같이 어린 시절에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낭만과 설렘으로 채색된다. 겨울이라는 계절은, 긍정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은 차치해 두고서라도 '눈이 내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계절이었다. 이상하게도 감기도 잘 걸릴지 않았던 것 같다. 지난 추억들을 기억할 때 인간이 아무리 미화된 이미지로서 그것을 회상하고 즐거움에 빠져들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손 치더라도, 예전의 즐거운 기억들이 절대 거짓되거나 과장된 즐거움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어렸을 적 겨울은 그러했다.
겨울이 싫어지기 시작한 것은 도시가 아닌 지역에서 무시무시한 겨울 추위를 몸소 경험하기 시작한 이후부터이다. 가장 단적인 예는 군대에서의 겨울일테다. 영하 20도 이하까지 떨어지는 작전지역의 벙커 안에서의 기억, 얼어붙은 눈길 위에서 몇 번이고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찧고 행군을 했던 기억들이 도시가 아닌 지역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겨울의 무서움을 체득하게 해주었다. 시골의 겨울은 얼어붙어서 감각을 느낄 수 없는 발가락으로 상징된다. 추위를 잊기 위해서 차라리 신체가 감각을 느끼지 못하기를 바랄 정도의 추위. 그리고 실제로 감각이 무더져가는 사족. 시골의 겨울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도시의 겨울은 얼마간, 그래도 참을 만하고 즐길 수 있는 그러한 계절로 더 오랜 시간 지속될 수 있었다.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오는 눈 내리는 거리를 지나갈 때, 각박한 도시의 삶 속에서도 한시적이라도 마음의 평안을 느낄 수 있는 것을 우리는 경험한 바 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 그리고 새해로 이어지는 들뜬 분위기에서도 우리는 겨울이 주는 낭만을 느꼈다. 물론 이러한 특수한 절기와 시기가 주는 분위기에 편승해서 상업적으로 활용하고자 온갖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이벤트를 동시적으로 실시하는 곳이 서울이기도 하지만 - 그래서 더더욱 요즘의 겨울은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 그래도 그 흥겨운 분위기를 잠시 동안만이라도 한 해에 한 번은 느껴볼 수 있다는 것이 서울과 같은 큰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한 것이다.
나이 서른이 지난 이후부터 겨울은 그저 답답한 계절이 되어버렸다. 연말이 가져다주는 부산스러움도, 흥겨운 연말 회식 자리와 같은 '어른들의 자리'도 갖지 못할 정도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보면 도시의 겨울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장점마저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겨울을 즐긴다는 것은 일종의 사치처럼 느껴진다. 유학을 다녀온 이후 두 번의 겨울을 보내게 되었는데 - 그리고 이것이 내 30대의 첫 두 번의 겨울인 셈인데 - 하나같이 심적으로 괴로운 상태에서 하릴없이 보내는 지겨운 계절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너무나 지루하다. 왠지 모르게 감기도 자주 걸렸고 몸이 아픈 적이 자주 있던 겨울이었다. 앞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과 함께 이 겨울을 겨울 나름의 계절감과 함께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만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더더욱 축 늘어지고 위축된 겨울이 돼버린 것이다. 날씨만이라도 따뜻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면, 따스한 햇살이 머리 위로 내리쬐어 준다면, 아스라한 꽃내음이라도 어딘가로부터 불어와 코로 들이마실 수 있다면, 이러한 불안한 심리 상태에서 잠시라도 즐거운 딴 생각에 빠져들 수 있을텐데.
특별히 이번의 (저주받은)겨울은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의 주기적이고 성실한 영향력 덕분에 공기조차 상쾌하거나 청량하지 못했다. 중국의 황사와 산업활동의 저주를 받은 대한민국은 이제 시골이든 도시든간에 광역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공기오염의 효과를 수시로 경험해야 하는 비참함까지 덧붙여 부여받게 되었다. 특히나 공기가 안 좋은 우리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두말 할 것도 없는 것이고. 답답하다. 상쾌한 봄내음이 언제쯤이나 코 끝을 자극할는지 모르겠다. 아주 기약이 없다가 몇 주간 다시 봄이 오는 것처럼 하더니만, 다시금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겨울이 끝날 즈음에 한 차례 눈이 많이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눈이 내려앉은 근무지 주변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어렸을 적 시선에서 이 광경을 봤다면 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큰 행복감에 도취되지 않았을까. 너무나 아름다운 눈꽃의 향연. 그리고 눈 온 뒤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적막감과 고요함. 바로 그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즐길 수 있었던 때가 순간적으로 그리웠던 순간이다. 지금은 그 낭만적인 적막감이 도시 생활에 찌들어있는 30대 남성의 황량함으로 전락했지만, 나는 겨울이 그저 답답한 계절이 아니라 그 자체를 향휴할 수 있는 매력을 지닌 계절로 머지않은 시기에 다시금 경험할 것이라고 약간의 희망을 가져본다.